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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도영은 살아있다고 생각”

입력 | 2008-08-05 02:58:00


작가 김인영 ‘태양의 여자’를 말하다

김지수와 첫 만남 ‘까칠’… 혼신의 연기 지켜보며 대만족

초라하게 시작해 화려하게 마감했다. 7월 31일 종영한 KBS2 ‘태양의 여자’ 첫 회 시청률은 6.8%(TNS미디어 집계). 그러나 11회부터 2배 가까이 뛰더니(12.4%) 마지막 20회에선 4배인 27.3%를 기록했다.

이런 시청률의 배경엔 스타급 캐스팅도, 색다른 소재도 없었다. 입양된 신도영(김지수)과 친딸인 윤사월(이하나)의 엇갈린 운명, 사월과 엄마(정애리)의 기억상실…, 설정 또한 진부해 보였다. 하지만 종영 후에도 시청자 게시판은 드라마의 여운을 곱씹으려는 글이 계속 올라온다. ‘웰메이드(well made) 통속극’이라는 모순적인 수식어가 뒤따르는 이번 작품은 배우의 연기도 빛났지만, 작가의 힘이 크다.

‘태양의 여자’를 쓴 김인영 작가는 ‘짝’ ‘결혼하고 싶은 여자’ ‘메리대구공방전’ 등을 통해 이름을 알려 온 13년차 작가. 그는 이 작품을 통해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것들, 인간이라서 가능한 것들을 이야기했다”고 했다. ‘열혈’ 시청자들을 위해 작가와 함께 드라마를 곱씹어봤다.

―그 어쩔 수 없는 것, 가능한 것은 뭔가.

“어쩔 수 없는 것은 자신을 넘어서는 욕망, 가능한 것은 사랑과 용서다.”

―드라마가 잘될 거라는 예감이 있었나.

“시작 전까지 자신 있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고 ‘나에게 이걸 쓸 수 있게 지혜를 터 달라’고 오랜 시간 기도했던 작품이니까. 초반 시청률이 오르지 않자 생각이 많아지더라. 스스로 못 견뎌 대본 구성을 바꾸고 엎어 치고 메쳤다. 이건 내 작가 인생에서 그저 흘러가는 작품이 아니었으니까.”

―왜 이 작품이 유독 특별한가.

“1996년 작가 생활을 시작했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을 그려낸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다.”

―얼핏 줄거리만 보고는 그저 그런 통속극이라고 생각했다.

“통속극이라는 말엔 동의하지 않는다. 이건 휴먼 드라마다. 대체로 그런 유(통속극)는 이런 것일 것이다. 언니에게 버림받은 동생이 진실을 밝혀내고,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언니를 무찌르고 정의가 승리하는 것! 하지만 이 작품은 시청자에게 익숙한 얘기에서 벗어났다.”

―어떤 면에서 그런가.

“지금까지 늘 보아오던 악녀에게는 없던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도영이) 나쁜 짓을 한 걸 뻔히 아는데도 숨겨주고 싶고, 시청자가 ‘너 얼른 도망가!’라고 해주고픈 마음을 끌어내고 싶었다.”

―이하나는 이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코믹하고 유쾌한 이미지의 이하나에게 사월 역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었지만, 머리 좋고 상상력이 풍부한 배우다. 내가 배경수 연출에게 직접 추천했다.”

―김지수는 도영 역을 통해 재발견됐다는 평을 듣는다.

“김지수는 기대 이상이었다. 캐스팅을 확정 짓기 전 만났을 때의 첫인상은 ‘까칠했다’. 게다가 도영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망설이고 있어 작가로서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데 대본 연습 때 도영에게 모든 걸 다 걸 태세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나타났다. 드라마를 하면서 배우 김지수를 다시 봤다.”

―도영과 사월, 둘 중 어느 캐릭터에 애착이 가나.

“두 여자 모두에게 나의 분신처럼 애착이 가지만, ‘아벨’보단 ‘카인’ 쪽에서 작품을 봤다. 하지만 도영에게 모든 이야기가 쏠린 건 아니다. 사월이 자신의 과거를 알고 언니에게 복수를 준비하는 과정도 공들였다. 착한 여자라 예상되는 사월에게 있을 수 있는 인간적인 욕심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게 인간이니까.”

―동우는 도영의 모든 허물을 받아주고 무조건적인 애정을 준다. 작가의 이상형인가.

“외롭고 원죄를 가진 도영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는 남자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이상형(그녀는 30대 싱글녀다)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레트 버틀러다.”

―비정상적일 만큼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고 외로워하는 도영의 심리가 굉장히 섬세하게 그려진다. 작가의 실제 가족관계가 궁금해질 만큼.(웃음)

“나는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부모로부터 사랑받고 자란 딸이다. 엄마의 관심도 모자라지 않았다. 물론 동생을 버린 적도 없고.(웃음) 그냥 예전에 취재차 방문한 보육원의 쓸쓸한 풍경을 떠올리며 이리저리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창작의 촉수가 ‘인간의 외로움’이라는 주제에까지 뻗치게 됐다. 그냥 영락없는 작가라고 써 달라.(웃음)”

―수많은 명대사가 나오는데 본인이 제일 마음에 드는 대사는….

“아빠가 도영에게 한 대사다.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이런 일이 생겨선 안 되는 100가지 이유를 댈 수 있지만 하늘은 그런 일을 우리에게 준 101가지 이유를 갖고 있을 거야. 지금은 우리가 그걸 알 수는 없지. 좀 더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먹은 후에 알게 되겠지.”

―작품을 쓰면서 원래 생각했던 내용과 달라진 게 있나.

“특별히 바뀐 건 없다. 처음부터 결말은 그저 도영이가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시청자의 반응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도영은 사월의 어깨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그리고 나타난 성경 구절은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게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였다. 대체 도영은 죽은 건가, 산 건가.

“그건 시청자의 몫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작가가 정확한 답을 내리긴 싫다. 시청자의 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나는 도영이가 살아있다고 생각한다.”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