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마종기 지음/문학과지성사
“밤새 내리던 눈이 드디어 그쳤다. 나는 다시 길을 떠난다. 오래전 고국을 떠난 이후 쌓이고 쌓인 눈으로 내 발자국 하나도 식별할 수 없는 천지지만 맹물이 되어 쓰러지기 전에 일어나 길을 떠난다.”(표제작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중에서)
뼛속 깊이 사무친 떠도는 者의 ‘애련’
여행 작가이자 시인인 이병률 씨는 마종기 시인을 “여전히 청년의 마음으로 시를 쓰는 시인”이라 불렀다.
1939년생, 1959년에 등단해 내년이면 등단 50주년과 고희를 맞은 시인에게 젊음의 향취라. 1980년 세상에 나와 지난달 19쇄가 나온 이 시집은 그런 헛헛한 의구심을 씻어주는 단초로 손색이 없다.
‘항아리를 그리기 시작했다./빈 들판같이 살기로 했다./남아 있던 것은 모두 썩어서/목마른 자의 술이 되게 하고/자라지 않는 사랑의 풀을 위해/어둡고 긴 內面의 길을/핥기 시작했다.’(‘그림 그리기’ 중에서)
그의 시는 어렵지 않다. 시에 소경 신세라 해도 읽을 만하다. 끝자락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김주연 씨도 “이해가 잘 안 가는 어려운 단어도 없고, 이른바 관념적인 난해의 그림자도 없다”고 했다.
그런데 그 정갈한 시어가 뭉클뭉클 가슴에 꽂힌다. 예쁘고 낙낙한 시가 처연하게 슬퍼진다.
‘목숨을 걸면 무엇이고/무섭고 아름답겠지./나도 목숨 건 사랑의/연한 피부를 쓰다듬고 싶다.//날아도 날아도 끝없는/成年의 날개를 접고/창을 닫는다. 빛의/모든 슬픔을 닫는다.’(‘成年의 비밀’ 중에서)
이병률 시인은 꽤 여러 차례 이 시집을 들고 서울 청량리역을 찾았다 한다.
굳이 어딘가로 떠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역사에 앉아 시집을 읽고 또 읽었다.
‘기차를 타지 않아도 기차를 탄 듯’ 그렇게 시집은 그 자체로 여행이 됐다.
“여행을 떠날 때면 꼭 이 시집을 챙겼다. 객차에 오르지 않아도 몸을 실은 듯 느껴졌다. 펼치지 않아도 시집을 읽은 듯했다. 아픈 것, 따뜻한 것, 쓸쓸한 것들로 온몸이 달궈지는 기분. 그럼에도 순해지는 기분.”
쓸쓸함에도 따뜻해지는 것은 시인의 습속과도 맞닿는다. 그의 시 ‘그리고 平和한 時代가’에서도 언급했듯 시인은 ‘外國에서 낳고 자라고/故國에서 思春期를 보내고/다시 外國에 나와 있다.’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그의 그리움에 절절한 애정이 담뿍한 이유. 그건 떠나본 자의 애련이다.
“어쩌다가 나는 고국을 떠나 흘러 다니는 이민자가 되었다. 떠나 살면서 더욱더 아름다운 모국어에 대한 사랑과 자랑을 지니게 되고, 내 모국의 이리저리 뚫린 골목길의 조그만 입김들이 만들어놓은 조그만 풀잎까지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오래건 잠시건, 터전을 벗어나본 사람은 안다. 그곳은, 그이는 ‘안 보이는’ 게 아니다. 눈에 밟히고 밟히며 뚜렷해질 뿐. 떠남이 뼛속 깊이 새겨져 긴 목청을 뽑은 시인의 노래. 여행길에 이만 한 길벗이 또 있을까. ‘빛의 모든 슬픔’을 닫을지언정 마음은 더욱 훤하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