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여러 예술의 장르가 있지만 죽은 이를 위로하는 형식을 가진 장르는 드물다. 미술은 정황적이고, 음악은 치명적이며, 무용은 장식적이다. 오로지 시만이 그런 위로가 가능한 형식을 갖고 있다. ‘죽은 벗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그런 시의 형식을 잘 드러낸다. 그러나 역시 황인숙답게 풀어낸다.
황인숙처럼 명랑한 시를 쓰는 시인도 드물다. 황인숙처럼 통통 튀는 언어를 구사하는 이도 없기에 그렇다. 황인숙의 언어는 입 안에서도 통통 튀고, 이미지의 심상에서도 통통 튄다. 그의 시는 아무리 암울한 얘기를 하고 있어도 쾌청한 날씨를 잊지 않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언제나 하는 얘기지만 황인숙 같은 시인은 다시없을 것이다. 이 시를 보라. (‘죽은 벗에게’라는 이 시의 부제를 꼭 염두에 두자) 시인은 죽은 이를 부르며 위로하고 있지만 정작 죽은 이에게는 없는 오늘이 자신에게는 있는 이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오히려 위로 받고 있음을 숨기지 않는다. 이어서, 죽은 이에게는 없는 날들을 단지 파지처럼 쌓아 두고 지내는, 살아 있는 이의 무력함에 대해 죽은 이가 살아 있는 이를 향해 화를 내고 있다. 죽은 이는 죽은 이대로, 살아 있는 이는 살아 있는 대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이와 죽은 이가, 부재한 날들과 존재하는 날들을 두고 벌이는 이 미묘한 관계에서 ‘오오, 미안’이라는 굉장한 사과가 터져 나온다. 단지 흥미로운 관계였던 산 이와 죽은 이의 긴장이 살아 있는 이의 이 한마디로 시를 확, 점화시킨다. 그 점화의 불꽃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외침. ‘나도 미친 듯이 살고 싶다!’ 정말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으랴. 그러면 정말, 그와 나의 이 추위가 벗어질까?
함성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