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하(聖下), 미켈란젤로 선생은 이 일을 해낼 만한 충분한 용기나 배포가 없습니다. 인물화 경험도 충분치 않습니다.”
1506년 봄 미술가이자 건축가인 도나토 브라만테는 “시스티나 성당 천장 프레스코화(젖은 석고 위에 안료로 그리는 그림)를 미켈란젤로에게 맡길 생각”이라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말에 이런 이유를 들어 반대했다.
영국의 역사소설가 로스 킹의 ‘미켈란젤로와 교황의 천장’(다다북스)에 따르면 로마 성 베드로 성당의 건설 총책임자인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의 라이벌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제자를 통해 이 대화를 전해 들은 31세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성공을 질시하는 자들의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고 믿었다. ‘피에타’ ‘다비드’ 등을 조각해 명성을 얻은 그였지만 프레스코화에는 경험이 거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한 해 전 묘의 조각을 맡긴 교황이 대리석 구입비용을 제대로 안 준 데 대한 배신감도 컸다. “로마에선 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교황에게 전해 달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로마를 탈출했다.
시스티나 성당은 교황 식스투스 4세가 건설한 교황 전용 예배당이다. 폭 13.2m, 길이 41.2m, 높이 20m로 구약성서에 나오는 솔로몬 성전과 같은 비율로 지었다. 1483년 8월 9일 봉헌미사로 처음 공개됐으며 지금까지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 회의 ‘콘클라베’의 개최장소로 쓰이고 있다.
식스투스 4세의 조카인 율리우스 2세는 1503년 즉위한 뒤 천장이 갈라진 이 성당의 보수를 결정하면서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의뢰하려 했던 것. 교황은 고향 피렌체로 도망친 미켈란젤로에게 돌아오라고 독촉했다. 고집 세고 괴팍하기로 유명한 미켈란젤로도 1508년에 결국 로마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러 조수를 썼지만 1000m²가 넘는 천장에 그림을 그리는 작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교황은 원, 사각형 등 기하학적 무늬로 천장을 장식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구약, 특히 창세기의 장면들로 천장을 채우겠다는 뜻을 관철시켰다.
초기에 ‘대홍수’ ‘술 취한 노아’ 등을 그리며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하지만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아담의 창조’는 2∼3주 만에 완성했다. 비스듬히 누워 왼손 검지를 내민 아담에게 흰 수염을 흩날리는 하느님이 오른손을 뻗어 생명을 불어넣는 이 장면을 훗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E.T.’에서 패러디했다.
작업 개시 후 4년 4주 만인 1512년 11월 1일 전체 천장화가 공개됐다. 그날 로마 사람들은 미켈란젤로가 그토록 그리기 싫어하던 천장화가 그의 생애 최고의 걸작이 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