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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운명 “조국보다 승부 먼저”

입력 | 2008-08-13 03:03:00


“이런 상황은 사실 예상하지 않았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부담감이 잔뜩 묻어났다.

박주봉(44) 일본 올림픽배드민턴팀 감독.

그가 이끄는 일본 여자복식의 마에다 미유키-스에쓰나 사토코 조는 13일 한국의 이경원-이효정(삼성전기) 조와 결승 진출을 다투게 됐다.

마에다-스에쓰나 조는 8강전에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세계 랭킹 1위인 양웨이-장제원 조에 2-1(8-21, 23-21, 21-14)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대회 초반 최대 이변을 일으키며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이들은 일본 배드민턴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준결승에 오른 뒤 마치 우승이라도 한 듯 눈물을 펑펑 쏟았고 박 감독은 그런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기쁨을 나눴다.

당초 이 종목 전망에서는 중국과 한국이 4강에서 맞붙는 게 유력했지만 이제 박 감독은 절친한 선후배들이 몸담고 있는 모국 팀과 만나는 얄궂은 운명이 됐다.

박 감독은 김중수(48) 한국대표팀 감독의 부인인 정명희 씨와 1980년대 혼합복식 콤비를 이뤄 세계 무적으로 군림했다. 김 감독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평소 국제대회에서 만나면 한국식당에서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이런 인연에 최근 독도 문제에 따른 한일 관계를 의식한 듯 박 감독은 “한국 선수들이 유독 일본 선수들에게는 강한 면모가 있고 실력도 한 수 위다”면서도 “그래도 일본의 사상 첫 올림픽 메달이 걸린 만큼 호락호락하게 넘어갈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한국대표 시절 세계선수권 7회 우승을 비롯해 국제대회에서 80승 이상을 거두며 ‘셔틀콕 제왕’으로 불린 박 감독은 지도자로도 성공시대를 걷고 있다. 영국과 말레이시아에서 지도자를 거친 데 이어 2005년부터 연봉 1억2000만 원에 주택과 차량, 자녀교육비까지 지원받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일본 대표팀을 맡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에 머물던 일본 배드민턴은 박 감독 밑에서 착실하게 실력을 쌓아나갔고 2006년 도하 아시아경기에서는 여자 단체전에서 한국을 꺾고 동메달을 차지하기도 했다. 강력한 체력과 세밀한 기술의 조화를 강조하는 박 감독 특유의 훈련 방식이 빛을 보고 있는 것. 올림픽을 앞두고 박 감독은 각자 선수들에게 가장 경기 내용이 좋았던 장면이 담긴 DVD를 나눠주며 자신감을 키워줬다. 내년 3월 일본 감독 계약이 끝나는 그는 벌써부터 재계약 요청이 쏟아지는 것으로 전해졌다. 묘한 처지가 된 박 감독이 이번 한일전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흥미롭기만 하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