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명치끝에 매달려 있던 ‘국민 우울증’이 드디어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국민 남동생’ 박태환이 보여준 시원한 미소, 네 번씩 수술하고도 번쩍 금메달을 들어 올린 ‘싸군’ 사재혁의 의지력에 스포츠 문외한인 나까지 행복해졌다. 금이 더 안 나와도 괜찮다. 역시 독한 민족, 대단한 나라다 싶다.
중-러, 독재 자본주의의 새 시대
우리나라니까 신나는 게 당연해 뵈지만 부지런한 과학자들은 이런 신바람의 이유를 밝혀냈다. 우리 뇌 속에 ‘거울 뉴런’이라는 특별한 세포가 있어서 선수가 움직이면 내가 괜히 몸을 움찔대면서 선수와 똑같은 느낌을 갖는다는 거다. 대체로 나와 가까울수록 감정이입은 강해진다. 스포츠가 아니어도 그렇다. 한국인이 밖에 나가 이겼거나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애국심이 절로 솟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라가 부강해질수록 자부심과 삶에 대한 만족도는 그래서 커진다. 한때 국민소득이 일정 수준에 이르면 더 부국이 돼도 행복도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이론이 우세했지만 그게 1974년에 나온 연구이고 세상은 달라졌다. 돈과 경제성장의 가치를 가볍게 보는 이들은 국민소득에 대한 ‘재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47개국을 조사한 퓨리서치 연구만 봐도 분명 잘사는 나라일수록 행복도가 높았다.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의 만족도는 크게 높아졌다. 지난 5년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각각 58%, 42%나 늘어난 중국과 러시아가 후자에 속한다.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화려하게 펼쳐진 8일, 세계는 자유민주주의라 할 수 없는 이 두 나라의 강성대국 부활을 목격했다. 중국의 웅대한 개막식은 화평굴기(和平굴起)라기보다 ‘보아라, 중화민족을!’ 식의 선전포고였다. 러시아는 옛 위성국이었던 그루지야에 선전포고도 없이 쳐들어감으로써 19년 전 종언을 고했던 냉전의 역사를 거꾸로 되돌렸다. 서구 언론은 ‘권위주의의 새 시대’가 돌아왔다며 ‘8일 세계는 달라졌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중국과 러시아가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닌 건 분명하다. 그러나 또 하나 분명한 것은 그 나라 국민이 자기 삶뿐 아니라 제 나라에 대해서도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6월 퓨리서치 여론조사에선 국가 방향에 만족한다는 응답이 24개국 중 중국에 제일 많고 우리는 꼴찌에서 세 번째였다. 그루지야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친 지금 러시아의 내셔널리즘은 하늘을 찌른다는 보도다.
공교롭게도 사흘 전 이명박 대통령은 “중국은 13억이 하나가 돼 있는데 우리는 분열과 대립만 있다”고 했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경제지상주의’를 천명해 달라고 화답했다. 도덕성을 내걸었던 노무현 정부나 도덕성 대신 경제 살리기만 기대했던 이명박 정부나 전리품 갈라먹기 식 보은인사는 마찬가지인 걸 보면, 민주주의란 결국 평화적 정권교체를 보장하는 데 불과한 게 아닌지 환멸스러워진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다. 경제만 잘 돌아간다면, 그리하여 정부가 국민을 자부심 넘치게 해주기만 한다면 민주주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자유와 민주, 성장과 행복을 함께
눈 씻고 다시 들여다본 퓨리서치 조사에서 “중국 정부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합니까”라는 문항에 중국의 답변은 빈칸이었다. 중국에선 이 질문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유능한 엘리트 일당 독재가 시장경제와 손잡고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는 ‘베이징 모델’의 실체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선거로 대통령과 국가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이런 자유를 보장하는 법과 제도를 해치는 게 용납되던 시대는 갔다. 집권세력이든 반대세력이든, 좌파든 우파든 마찬가지다.
국민의 자유와 책임을 강조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그래서 좋다. 63년 전 광복으로 거저 얻은 게 아니라 60년 전 정부 수립과 함께 지켜냈기에 더 자랑스럽다. 우리처럼 독한 민족, 대단한 나라는 경제야 지금 같은 신바람으로 얼마든지 살려낼 수 있다. 대통령이 열독했다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