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 못딴 선수들도 웃음 가득
18일 베이징 올림픽 탁구 남자단체전에서 동메달을 딴 유승민은 “동메달이 이렇게 기분 좋을 줄 몰랐다”며 활짝 웃었다. 금메달 후보였던 역도의 윤진희도 자기 기록을 못 내 은메달에 그쳤지만 “금메달이었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최선을 다한 것에 만족한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은메달을 따고도 ‘금메달을 따지 못한 죄’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이전 올림픽 선수들에 비하면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유승민이나 윤진희에게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다는 ‘우울한 얼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처럼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국내에서 ‘금메달 지상주의’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관중도 굳이 금메달을 찾지 않으며,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와 함께 경기를 즐기면서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회사원 김현숙(34) 씨는 11일 남자 유도 73kg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왕기춘의 미니홈피를 방문해 축하의 글을 남겼다. 갈비뼈 부상을 입고도 그가 보여준 투혼에서 금메달을 뛰어넘는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왕 선수의 홈피를 방문한 10만여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같은 날 펜싱 여자 플뢰레 개인전에서 은메달을 딴 남현희의 홈피도 축하객으로 북적거렸다.
지상파 방송이 중계를 거의 하지 않는 비인기 종목에 출전한 선수들에 대한 성원도 이어지고 있다.
15일 마장마술에서 최준상이 47명 중 46위를 차지하자 누리꾼들은 ‘올림픽 출전만으로도 대단하다’ ‘4년 뒤를 기대한다’고 격려의 글을 보냈다.
사이클 개인도로 부문에 출전했던 선수들이 저조한 성적 끝에 개막 4일 만에 귀국했다는 소식에는 ‘나도 금메달에만 눈이 멀었었는데 정말 죄송하고 수고했다’는 등 성원이 이어졌다.
이런 변화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유도 남자 60kg급 최민호가 4년 전 아테네 올림픽에서 동메달에 그친 뒤 금메달리스트와의 차별 대우에 눈물을 흘렸던 것과 크게 달라진 양상이다.
박진경 관동대 스포츠레저학부 교수는 “국력 신장과 더불어 스포츠를 대하는 여유가 생기면서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난 관중이 경기 자체를 즐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관중의 변화와 더불어 선수들도 스스로 승패를 떠나 경기 과정을 즐기는 양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남자 역도 69kg급에서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꼴찌에 그친 이배영은 인터뷰에서 “최선을 다했기에 꼴찌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환하게 웃어 신선한 감동을 안겼다.
배드민턴 혼합복식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이용대가 ‘감동의 눈물’ 대신 카메라에 윙크를 보내는 여유, 수영의 박태환이 시상식에서 주먹에 입을 맞추는 세리머니 등에서는 ‘엄숙주의’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남중웅 충주대 스포츠학과 교수는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하고 국가를 위해 싸운다는 식으로 경기에 나서던 과거 선수들과 달리, 요즘 선수들은 스스로 좋아서 운동을 시작하고 자기만족과 개인의 명예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먹을 게 없어 라면만 먹고 달렸다’는 눈물 젖은 고생담과 ‘국가와 민족에 감사한다’는 식의 거창한 소감이 사라지면서 이번 올림픽은 선수와 관중 모두 경기 자체를 즐기는 올림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한국선수단 25일 세종로서 첫 도보 퍼레이드 펼친다▼
한국 선수단은 본단 귀국일인 25일 서울 종로구 세종로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해단식을 갖고 세종로 사거리에서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까지 첫 도보 퍼레이드를 한다.
대한체육회 관계자는 18일 “선수단 도보 퍼레이드의 세부 일정은 관련 단체들과의 최종 협의를 거쳐 19일 확정된다”고 밝혔다. 퍼레이드가 끝난 뒤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축하 행사가 이어질 예정이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