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한 내 생애에 통일을 볼 수 있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나이가 아직 60대라면 능히 이런 장담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대도 이미 후반으로 기운 사람에겐 그런 낙관이 쉽지 않다. 그보다도 어떤 통일이나 하기만 하면 좋은 것인지, 그것도 꼭 자기가 통일을 봐야 하는 것인지…. 나에겐 그런 소망은 없다.
남북 분단을 생각할 때, 특히 북한 현실을 생각할 때 ‘통일’은 내게 첫 번째가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아니 네다섯 번째의 우선순위밖에 갖지 못한다. 남북 관계에서 최우선순위를 갖는 안건은 다른 무엇으로도 보상할 수 없는 ‘평화’다. 한반도에 전쟁이 난다면, 그래서 설혹 통일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잃어버린 평화를, 평화의 죽음을, 수백만 동포의 죽음을 보상해 줄 수는 없다.
평화를 희생한 통일보단 차라리 통일을 희생한 평화가 내겐 낫다. ‘통일전쟁’은 평화를 살육함으로써 동족을 살육하는 전쟁범죄요, 민족에 대한 범죄이다. 게다가 많은 경우 통일전쟁은 평화만 살육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도 살육해 버리기 십상이다. 6·25 남침전쟁이 그랬던 것처럼….
남북관계에서 통일보다 더 긴요한 또 다른 안건은 북한 주민의 생존이요, 복지다. 통일을 도모하기 위해, 선군 정치를 펴기 위해, 일반 주민은 끼니도 때우지 못해 굶어 죽는 것보다 분단 상태에서라도 북한 동포가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게 지내도록 하는 데에 우선순위가 매겨져야 한다. 그렇게 나는 생각한다.
평화 -北주민복지 더 중요
마치 ‘우리는 하나’인 듯이 한반도기를 높이 들고 올림픽 대회의 개막식에 남북이 단일팀을 구성해서 입장하는 모습은 물론 그림이 나쁘지 않다. 그러나 우리는 이산가족끼리도 만나지 못하고 편지 한 장 마음대로 주고받지 못하는, 하나 아닌 둘로 갈라져 살고 있고, 나라 이름조차 ‘한국’과 ‘조선’으로 갈라진 하나 아닌 둘이다.
마치 분단의 경계선을 서서히 철폐해 가는 것처럼 휴전선을 넘나들며 금강산 관광을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북녘의 금강산에 가면 남한 관광객이 가는 곳마다 철조망으로 새로운 경계선이 쳐져 있어 북한 주민은 근접도 못하는 곳이 금강산 관광지다. 금강산으로 가는 통로가 다시 폐쇄되고 내 생애엔 천하의 명승지 금강산을 가볼 수 있는 길이 아예 막혀 버린다 치자. 그래도 북한 주민이 자유롭게 북한 내부를 여행하고 그들이 금강산 백두산을 가볼 수 있다면, 나는 금강산 백두산에 못 가도 괜찮다.
동서독 분단시대에 일찍이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는 독일 문제의 ‘오스트리아적 해결방안’을 제안한 일이 있었다. 같은 게르만 민족이지만 오스트리아가 자유로운 국가로 분리 독립한 사실을 받아들였듯이 동독이 자유로운 국가체제를 갖추기만 한다면 같은 독일 민족이지만 분리해서 별개의 국가를 건설한 것을 받아들이자는 제안이었다. 1960년대에 서독의 ‘동방정책’이 출범하기 훨씬 앞서 나온, 당시로선 매우 파격적이요 선구적인 발상이었다.
그 뒤를 이어 사민당의 전략가 헤르베르트 베너의 제안이 또 하나 금단을 깨고 나왔다. 동독이 공산주의 체제를 고수하더라도 그 당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처럼 자유로운 사회체제를 지니게 된다면 별개의 국가로서 분리 독립하는 것을 받아들이자는 이른바 ‘유고슬라비아적 해결방안’이다.
이분법 벗어나 유연한 발상을
한반도 문제에 있어서도 ‘분단’ 아니면 ‘통일’이라는 흑백 논리의 2항(項)도식에서 벗어나는 유연한 발상이 미래를 열어 줄지 모른다. 남북한의 오스트리아적 해결방안이 전쟁통일을 성취한 ‘베트남적 방안’보다 나음은 물론이다. 유고슬라비아적 방안도 베트남적 방안보다는 낫다.
집단적 기아상태를 방치하는 오늘의 북한 현실을 생각해 본다면 이 모두가 한가로운 잠꼬대처럼 들릴지 모른다. 통일이 안 돼도, 민주적인 국가체제를 못 갖춰도, 또는 자유로운 사회체제를 못 갖춰도 좋다. 다만 수백만 동포를 굶겨 죽이지는 않는 중국식 개방체제만이라도 북한이 갖춘다면 그것을 성급한 통일보단 우선해야 되지 않을까. 베이징 올림픽으로 다시 한 번 ‘천지개벽’을 하는 중국에 가보고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본보 객원大記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