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를 읽고 나면 ‘파문’이라는 단어가 궁금해지는 시간이 옵니다. 파문은 물기의 파장이 동심원을 형성하면서 둥글게 둥글게 번져가는 일인데, 번져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그곳에 지금 어떤 마음이 가고 있는지 잘 몰라도 가슴 한가운데 물기가 맺히면서 애잔한 기분을 느끼는 일입니다. 파문이라는 단어를 상상하기 위해선 그보다 먼저 동그라미를 상상해 보아야 합니다. 동그라미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가두어 두었던, 잊고 있던 소식들이 없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동그라미처럼 바깥이 아니라 안에서 안으로 번지는 일을 성큼 시작해야 할지 모릅니다.
시인은 비가 내리는 좁은 처마를 올려다보며 처마에 매달린 빗방울이 다른 빗방울로 옮겨지는 것을 바라보고 파문이라고 부릅니다. 아마도 시인은 오랜 시간 처마 아래서 그런 것들을 바라보았나 봅니다. 발목 아래 피어나는 작은 동그라미들을 보면서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당신의 오른쪽이나 나의 왼쪽이 젖도록 비를 긋곤 했나 봅니다. 그러니 우리도 파문이라는 단어가 궁금해지면 이쪽의 간격과 저쪽의 간격에 대해 한참 바라보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있는 반대편에 세상이 있을 때 그 간격을 파문이라고 부르는 날, 우리는 동그라미를 사랑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릅니다. 시인처럼 라디오 속에 끓고 있는 잡음의 한가운데에서 오래 사랑하거나 오래 사랑했거나 오래도록 사랑해야 할 그 사람의 목소리를 찾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는 일이 참 쓸쓸한 동그라미를 그려가는 일이라고 생각될 때, 그 안에 사랑이란 자신에게서 피어나고 있는 주파수를 넣어주는 일이라고 생각될 때, 이 시를 품속에서 몰래 꺼내 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길을 가다가 비를 피하기 위해 우연히 어느 집 처마 아래에 서 있을 때, 빗살을 보면서 오래도록 부재했던 그리움 쪽으로 둥글게 번져가는 일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한 번은 파문, 해보아야 합니다.
김경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