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곤색’의 늪에 빠진 아버지들
“오늘은 주말이니 캐주얼로!”라며 휘파람을 불던 아버지는 옷장을 열고 ‘곤색(감색)’ 양복바지에 발 한 쪽을 집어넣었다.
줄무늬 반팔 드레스 셔츠를 꺼내 단추를 잠갔다. 이게 캐주얼?
노타이 차림의 여름 회사원 복장이었다.
습관이 무서운 걸까.
아버지는 갑옷 같은 양복 스타일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좀 더 멋을 내볼까?”라고 말한 아버지는 다시 옷장을 이리저리 휘저었다.
“그래, 이거야!”라며 아버지는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등산용 조끼를 꺼내 그 위에 걸쳤다.
오늘도 정장과 캐주얼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는 우리의 아버지들.
교복과도 같은 양복, 아니면 등산복, 그도 아니면 골프웨어가 전부인 중년 남성의 패션을 어찌해야 할까.
진정 이들에겐 ‘곤색’이 전부인 것일까?
#2 “콧수염 아저씨? 아니 미(美) 중년!”
지난달 7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
빨간색 체크무늬 셔츠, 청바지에 흰 운동화 차림의 한 남자가 패션쇼 무대에 걸어 나왔다. 사람들의 시선은 옷보다는 그의 주름, 희끗한 콧수염에 고정됐다.
아저씨와 할아버지의 접점에 서 있는 그는 서울 강남에서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이영인(63) 씨.
중년 남성을 겨냥한 브랜드 ‘엘 파파’의 모델로 발탁된 그는 형형색색의 스타일을 선보였다.
마치 “곤색 바지는 넣어둬”라고 말하듯.
● 패션계 ‘블루오션’ 중년 남성 캐주얼!
63세 모델을 기용해 화제가 된 엘 파파는 8년간의 준비기간을 걸쳐 최근 론칭한 신규 브랜드다. 일본의 중장년 남성 패션 브랜드인 ‘파파스’를 벤치마킹한 엘 파파는 할리우드 배우 리처드 기어를 메인 모델로 세우며 이번 시즌 총 250벌의 의상을 공개했다.
등산복이나 골프웨어가 아닌, 젊은층에서 유행하고 있는 ‘레이어드(겹쳐입기) 룩’이 기본 연출법이다. 체크무늬 셔츠를 바지 밖으로 꺼내 입고 그 위에 조끼나 카디건을 걸쳐 입는 것. 여기에 바지 끝단을 접는 ‘롤 업’ 스타일도 제안했다.
문진이 마케팅 팀장은 “배나 허벅지 등 살찐 체형을 극복하는 게 중장년 남성의 과제”라며 “겹쳐 입는 방식으로 이를 보완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빨강, 노랑, 초록 등의 원색을 과감하게 사용해 젊은 중년 이미지를 살리려 한 것도 특징이다.
올가을 겨울 지상과제가 ‘양복 중년들 옷 갈아입히기’인 듯 중년 남성을 타깃으로 한 캐주얼 브랜드들의 활동이 활발하다.
‘맨스타’, ‘캠브리지’ 등 신사복 위주였던 코오롱 패션도 슬림한 ‘유러피언’ 캐주얼을 표방하며 각 브랜드 콘셉트를 세분화시켰다. ‘캠브리지 멤버스’는 체크 셔츠와 트렌치코트를 내세워 영국의 ‘모즈룩’을 표방했고, ‘맨스타’는 노랑, 주황 등으로 지중해 느낌의 밝고 따뜻한 ‘이태리 패션’을 선보였다. 여기에 세계적인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와 함께 작업한 국내 디자이너 채규인 씨를 영입해 아방가르드한 비대칭 재킷도 내놨다.
이들의 목표는 ‘죽은 라인’ 살리기. 과거 옷들이 몸매를 감추기 위해 일자형으로 펑퍼짐했다면 지금은 최대한 굴곡을 그리는 것이 과제다. 셔츠는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기 위해 V라인 형태가 많고, 바지는 처진 엉덩이 부분을 올린 ‘힙 업’ 스타일이 주를 이룬다. 특히 허리 부분은 배 나온 중년을 위해 주름을 1개에서 2개로 늘리기도 했다.
● 아저씨가 되기 싫은 뉴 포티(New Forty)들
롯데백화점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30대 이상 남성들을 겨냥한 캐주얼 브랜드의 매출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0% 가까이 늘어났다. 특히 ‘로가디스 그린’, ‘마에스트로 캐주얼’ 등 신사복 캐주얼 브랜드에서 내놓은 빈티지 청바지 매출은 30% 증가했다.
인터넷 쇼핑몰에서도 마찬가지. G마켓에서는 흰색 링클 워싱 빈티지 청바지가 40대 이상 남성들에게 한 달 평균 700건 이상, 일자 워싱 청바지가 300건 넘게 팔리고 있다. 최근에는 중년 남성 고객을 잡기 위해 중견 탤런트 김용건을 모델로 내세운 ‘김용건 스타숍’을 만들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아내의 손을 뿌리치고 직접 쇼핑하는 ‘나홀로 쇼핑’ 중년 남성들이 늘고 있는 달라진 소비행태에 기인한다. 이들은 인터넷, 패션잡지 등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얻고 있다.
이러한 ‘뉴 포티족(패션, 여가 등 자신에게 투자하는 중년)’을 겨냥한 매장도 생겨났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의 편집매장 ‘샌프란시스코 마켓’은 30대 후반부터 50대 남성들이 주 고객층. 유럽 스타일의 슬림한 청바지와 캐시미어 소재의 니트가 이곳의 최고 인기 상품.
샌프란시스코 마켓 한태민 대표는 “뉴 포티족은 쇼핑 전 미리 원하는 아이템을 골라 충동구매를 줄이는 주도면밀함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 2030이 되고픈 4050… 자기애(自己愛)에 빠진 중년
중년 남성 캐주얼의 붐은 그만큼 꾸미고자 하는 중년 남성들이 많아졌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패션연구소 노소영 책임연구원은 “외모가 경쟁력인 시대에 중년 남성들도 무난한 스타일보다 개성을 추구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아저씨를 거부하는 시대. 인터넷 등을 통해 ‘미중년’ 스타가 양산되고 몸짱, 동안(童顔) 열풍이 이어지면서 20대처럼 과감한 연출을 하는 ‘능력있는 40대’가 많아졌다.
공급자로서는 막강한 구매력을 내세우는 중년 남성만한 고객이 없다. 편집매장 ‘분더숍 맨’의 황유선 주임은 “40대 이상 남성 고객들은 20대에 비해 매장 방문 횟수는 떨어지지만 구매력은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라며 “자연스레 이들이 좋아할 물건을 가져다 놓게 된다”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버느냐”는 것이 과거 중년 남성들의 과제였다면 지금은 “어떻게 쓰느냐”가 이들의 화두(話頭)라고 말한다. 황 주임은 “돈 버느라 수고한 자신에게 투자하는 것을 즐기는, ‘자기애’에 빠진 중년 남성들이 많아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