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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권오길]입덧은 태아의 자기방어

입력 | 2008-08-25 03:00:00


‘메뚜기도 오뉴월이 한철이다’라고 했던가. 황금물결 일렁거리는 가을 들판에서 메뚜기를 잡던 일도 옛날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잡아다 구워 먹었지만 기름에 볶아 도시락 반찬으로도 썼으니 고소한 맛이 단백질원으로 으뜸이었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몸피 큰 암놈이 더 맛이 있다.

메뚜기를 잡다 보면 가끔 무서워 움찔할 때가 많다. 배불뚝이 똥구멍에서 가는 철사(鐵絲)가 꾸물꾸물 기어 나오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메뚜기가 뜯어먹은 풀에는 냇물에 사는 연가시(유선형동물)가 낳은 알에서 깬 새끼벌레(유충·幼蟲)가 달라붙어 있다. 풀과 같이 먹힌 애벌레는 메뚜기 배 속에서 자라 성체(成體)가 되는데, 바로 어미 연가시가 꿈틀거리며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유충이 든 메뚜기를 먹은 사마귀에서도 술술 빠져나오니, 위험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들고튀는 연가시다.

여기서부터가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기생충이 자라서 배가 불룩해진 메뚜기나 사마귀는 전혀 엉뚱한 곳을 찾아 나선다. 물가로 가는 것이다! 알 낳을 곳은 양지바른 저쪽 언덕배기인데 왜 물을 꾸역꾸역 찾는단 말인가. 배 속의 연가시(기생충)가 이들(숙주·宿主)을 물 있는 곳으로 가게끔 틀고(꼬드기고) 있는 것이다. 냇물에 도달하면 다 자란 연가시가 기어 나와 스르르 물로 들어간다. 저런, 기생충이 숙주를 가지고 논다.

기생충이 숙주의 행동을 조절하는 또 다른 예로 광견병이 있다. 미친개의 뇌에 들어간 광견병 바이러스는 숙주 개를 무지하게 사납고 겁 없게 만들어버려 주인까지도 사정없이 물게 한다. 개의 이빨에는 바이러스가 든 침이 묻어 있어, 이렇게 다른 동물로 옮아간다. 오라, 그놈들의 재주가 기발하구나! 이뿐만 아니다. 말라리아(학질) 원충(原蟲)에 감염된 모기 역시 두려움 없이 덤빈다. 바이러스나 원충의 기막힌 전파(퍼뜨림) 작전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본론이다. 어찌하여 여성이 임신을 하면 입덧(악조증·惡阻症·morning sickness)이 날까? 식욕부진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을 보기만 해도 속이 메스꺼워 구역질을 한다.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이 안쓰러울 정도다. 퀴즈 하나. 입덧을 심하게 하는 여성이 있는가 하면 가볍게 넘어가는 여성이 있는데 이론적으로 어느 쪽 산모가 더 건강한 아이를 낳을까?

입덧이란 태아(胎兒)가 모체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태아가 스스로 자기를 지키는 긴요한 생리현상이다. 어디 보자. 임신 3, 4개월까지는 태아의 기관발생(器官發生)이 가장 활발하여 중요한 기관이 거의 다 형성되는 시기다. 신비롭게도 이 기간이 지나면서 입덧의 굴레에서 벗어난다.

그런데 만일 예민한 이 시기에 임신부가 술이나 담배를 포함하여 게걸스럽게 이것저것 먹다 보면 음식에 묻어(들어) 있는 유해성분이 여지없이 태아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쳐 저능아와 기형아의 출산위험이 늘게 된다.

예를 들어 바이러스, 곰팡이, 세균에다 음식 자체가 갖는 독물은 물론이고 농약, 제초제, 항생제 등 기피해야 할 것이 수두룩하다. 그러므로 입덧이 심하면 심할수록 튼실한 아이를 낳는다! 어머니들이여, 힘들고 괴로워도 내 아기의 건강을 위해 입덧억제제 같은 약물을 삼가야 한다.

어머니는 오심구토(惡心嘔吐)로 쓰디쓴 고생을 하건만 태아 놈은 엄마 건강은 아랑곳 않고 뼈와 살을 다 녹여 먹는다. 이렇게 발칙할 수가 있나. 기생충이 숙주의 행동을 바꾸는 예가 바로 산모의 입덧이었다니 말이다. 엄마 배 속에서는 물론이고 나와서도 속을 썩이니 자식이란….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생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