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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용아, 누가 좋겠냐” “대현이가 괜찮죠”

입력 | 2008-08-25 03:00:00

마운드에 우뚝 선 태극기9전 전승의 놀라운 성적으로 세계 야구의 정상에 우뚝 선 한국 선수들이 한국 야구의 세계 제패를 기념하기 위해 우커쑹야구장 마운드에 태극기를 꽂았다. 베이징=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 야구 ‘9회말 명승부’ 재구성

강민호 “류현진 공 낮았나” 심판에 물었다 퇴장

김감독, 베테랑 의견 즉석 수용… “함께 짝 이뤄라”

진갑용 “사형장 가는 심정”… 바깥 변화구 주문

극적인 더블플레이 유도… 감격의 그라운드 포옹

24일 오전 베이징 시내 코리아하우스에서 야구 대표팀 기자회견이 열렸다. 김경문(두산) 감독과 주장 진갑용(삼성), 그리고 이승엽(요미우리)이 참석했다. 인터뷰를 바탕으로 전날 쿠바와 결승전에서의 극적인 9회말과 우승 뒷얘기를 재구성했다.

3-2로 앞선 9회말 위기가 왔다. 선발 류현진(한화)이 선두 타자에게 안타를 허용한 뒤 다음 타자에게 볼넷을 내줘 1사 1, 2루가 된 것.

포수 강민호(롯데)는 불안했다. 쿠바 선수들과 주심이 스페인어로 쑥덕거리는 게 자꾸만 거슬렸다. 8회까지만 해도 스트라이크로 잡아 줬던 바깥쪽 낮은 공이 잇달아 볼이 됐다. 연속 볼넷이 선언되는 순간 강민호는 주심을 향해 몸을 돌렸다. 주심은 경기 속행을 위해 공을 빼려고 했지만 강민호는 글러브에 힘을 꽉 줬다. 그리고 “Low ball(공이 낮았나)?”이라고 물었다. 비록 웃으며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주심이 퇴장 명령을 내린 이유는 그게 다였다. 화가 난 강민호는 벤치로 돌아가면서 마스크와 글러브를 집어 던졌다. ‘사고’를 쳤지만 “선수들이 더 똘똘 뭉쳐줄 것”이라고 믿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갑갑해진’ 김 감독의 눈에 진갑용이 보였다.

진갑용은 대만전에서 오른쪽 허벅지 부상을 당한 뒤 경기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주장 역할을 제대로 못해 후배들에게 미안했고 역사적인 결승전에 못 나가 섭섭했던 터였다. 진갑용은 이날 불펜에서 후배들의 공을 받아 줬다.

“갑용아, 누가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으냐”

“아까 보니 (정)대현이 공이 괜찮던데요.”

김 감독은 정대현이 허리가 아프다는 것을 알았지만 베테랑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진갑용에게도 마스크를 쓰라고 지시했다.

“사형장에 끌려가는 심정”으로 안방에 앉은 진갑용은 정대현에게 바깥쪽 변화구를 주문했다. 병살타가 된 공은 진갑용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을 구질”로 남았다.

잠시 뒤 마지막 아웃 카운트를 기록한 공은 1루수 이승엽의 글러브에 있었다. 그는 뒷주머니에 공을 챙겨 뒀다 매니저에게 건넸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추진하는 야구박물관이 세워지면 누구나 ‘올림픽 금메달 공’을 볼 수 있다. 시상식이 끝난 뒤 선수들은 태극기가 꽂힌 마운드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선수들이 공동 취재구역에 남아 인터뷰하고 있던 진갑용을 불렀다. 그라운드로 향하는 진갑용은 절뚝거리고 있었다.

일본전을 앞둔 21일.

이승엽은 선수들과 어울려 시내에서 모자를 샀다. 막상 자신이 쓰기에는 너무 튀었다. 누굴 줄까 고민하던 중에 다음 날 선발이 김광현(SK)이라는 것이 떠올랐다. 방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모자만 두고 오면 누가 줬는지 모를 것 같아 쪽지에 간단한 글과 함께 사인을 남겼다. 다음 날 승리 투수가 된 김광현은 “어제 승엽이 형이 최선을 다해 파이팅 하자는 편지를 써줬다”며 고마워했다. 이승엽은 “광현이가 과장해서 얘기했다”며 겸연쩍어했다.

감독은 베테랑의 의견을 과감하게 받아들였다. 선배는 후배를 챙겼고, 후배는 선배를 따랐다. 돔구장 하나 없는 한국 야구의 가장 무서운 힘은 세계 최강의 팀워크였다.

베이징=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