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仁村의 ‘公先私後’ 삶은 민족사랑”
일제치하 협박-자금난 견디며 민족사업 펼쳐
이승만 도와 건국했지만 독재 비판하며 사직
자기주장보다 공론 중시…실천 앞세운 실용주의자
“인촌은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고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김구 선생이 부통령이 돼 우익진영이 화합하는 것이 민족을 위한 최고의 선(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된 뒤 독재를 하자 누구보다 강력히 비판했고 김구 선생이 남한만의 총선을 거부하고 김일성과 협상하기 위해 북으로 떠나자 서로 길을 달리했습니다. 공선사후(公先私後)의 삶을 살았던 인촌이 생각한 ‘공’은 (특정 개인이 아닌) 민족이었습니다.”
최근 학술지 ‘한국사 시민강좌’ 하반기호(43호)가 건국 60주년을 맞아 정치 교육 문화 경제 군사 등의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 32명을 선정한 가운데 이 중 인촌 김성수(1891∼1955) 선생을 재조명하는 논문을 기고한 백완기 고려대 명예교수의 말이다.
32명에는 이승만 이범석 정인보 등이 선정됐다.
백 명예교수는 정치 언론 교육 부문에서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운 인촌 김성수 선생에 대해 “일제 치하에서 지식인이 선택한 방법은 무장 항일투쟁을 포함해 여럿이었지만 인촌은 현실 속에서 민족사업을 하는 것을 택했고 그것은 누구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말했다. 25일 서울 광진구 중곡동 자택에서 백 교수를 만나 인촌의 철학을 들었다.
―인촌을 연구하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어른들로부터 인촌과 공선사후 정신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대학에서 강의하면서도 언젠가 인촌의 삶을 공선사후를 중심으로 연구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 자료를 모아 왔지요. 현직에서 물러난 뒤 2005년부터 자료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전기(傳記)가 아닌 사회과학적 논문을 쓰고 있어요. 가급적 올해 안에 책으로 펴낼 계획입니다.”
―인촌의 공선사후는 어떤 의미입니까.
“‘공(公)’은 민족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무장 항일투쟁을 비롯해 여러 가지를 할 수 있었겠지만 인촌은 당시 현실과 부대끼며 민족사업을 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조선인 주제에 무슨 학교를 세우느냐’는 등 총독부의 경멸, 친일파의 협박, 그리고 자금난…. 민족사업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젊었을 때부터 평생 불면증을 안고 살았습니다.”
―논문에서 건국 관련 인촌의 업적도 평가하셨는데….
“인촌은 공적인 면에서 공산주의와 독재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인촌과 (인촌이 이끈) 한국민주당(한민당)은 이승만 박사를 도와 대한민국을 건설하는 데 힘을 쏟았고 건국 이후 이 박사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 도왔습니다. 하지만 거창 양민학살사건 등을 비판하며 부통령 직을 사임할 때는 ‘이승만 정부 시절에 부통령이라는 이름이 올라갔다는 것에 대해 치욕을 느낀다’는 사임서를 쓸 정도였습니다. 사사오입 개헌 때도 마찬가지였지요. 인촌이 이 박사를 도운 것도, 독재를 비판하며 맞선 것도 모두 공(公)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김구 선생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은 어떻게 봐야 하나요.
“인촌은 ‘이승만 대통령, 김구 부통령’을 만들어 우익 진영이 화합하는 것이 민족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존중해 김구 선생을 이 박사와 다름없이 존경했지요. 하지만 임정이 귀국해 미군정에 정권을 달라고 했을 때는 반대했습니다. 치안을 비롯한 통치 능력이 없는 임정이 정권을 넘겨받으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입니다. 공산주의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했던 인촌은 김구 선생이 남한만의 총선을 거부하고 김일성과 협상하기 위해 북으로 떠나자 길을 달리했습니다.”
―인촌에 대해 ‘본래 정치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고 쓰셨는데….
“인촌은 한민당 수석총무(당 대표 격)로 당을 이끌던 평생지기 고하 송진우가 암살되면서 자의와 무관하게 정치 일선에 나서게 됐습니다. 당 중앙집행위원회가 한마디 상의도 없이 그를 수석총무로 선출한 뒤 세 차례에 걸친 설득과 강권을 통해 반(半)억지로 맡겼으니까요. 인촌은 상대를 공격하고 경우에 따라 모략과 음해, 거짓말도 해야 하는 정치와는 맞지 않았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싸움과 대결, 분열이 아니라 화합과 우애에서 의미 있는 삶을 찾으려고 했으니까요. 남 앞에 나서기보다 얘기를 듣고 공론을 모아 일이 성사되도록 후원하는 스타일이라는 점에서 리더십을 중시하는 대부분의 정치인들과 달랐지요.”
―리더십이 아니라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요.
“팔로어십(followership)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장서서 ‘나를 따르라’라고 하는 정치인들과 달리 그는 어디에 좋은 의견이 있는지를 좇아갔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였지요. 가장의 권한이 막강한 시대였지만 중요한 일이 있을 때는 늘 가족회의를 했습니다. 고하가 암살당하고 한민당 수석총무로 가기 전에도 가족회의를 해서 부인 등 가족의 동의를 구했어요. 그래서 인촌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결정들은 독선적인 것이 없었습니다.”
―궁극적으로 인촌을 어떤 인물로 평가하십니까.
“민족사업가, 교육자 등등 평가는 많습니다. 하지만 공선사후를 실천한 삶을 살펴보면 그는 실용주의자였습니다. 어떤 일이든 성사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성품은 실용주의적인 것이었지요. 그는 또 공사(公私) 모두에서 지역과 신분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호남 양반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사람을 쓸 때도 보편적 기준으로 등용했고 교우 관계에서도 그런 것을 따지지 않았습니다.”
―인촌을 연구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요즘 정치인들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들 합니다. 인촌은 자기주장보다 공론을 중시했습니다. 그는 또 화려한 계획이나 주장을 내세우고 실천하지 않는 것을 무엇보다 싫어했습니다. 말보다 실천이었다는 것이지요. 언행일치를 찾아보기 힘든 요즘 세태에서 배워야 할 점입니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
:백완기 교수:
△1936년 전북 고창 태생
△1959년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1972년 미국 플로리다주립대 정 치학 박사
△1978∼2002년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1996∼1998년 고려대 정경대학장
△2006∼2008년 행정개혁시민연합 공동대표
△2002년∼현재 고려대 명예교수
△2007년∼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