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미칠 듯이 화가 치미는 때가 있다. 참다 참다 드디어 못 참고 막 발광을 하려 할 때, 마침 나보다 더 성질 급한 사람이 옆에서 먼저 화를 터뜨릴 때, 내 마음은 순간 고요해진다. 그래 잘한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럴 때 내 마음은 대리만족하여 평상심으로 돌아온다. 나는 여전히 신중한 사람이 된다. 너의 화 덕분에.
그런데 고작 꽃에게, 풀에게 화를 내고 있다. 그것도 깃털이나 지푸라기 같은 화를 표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사물을 던지면서 말이다. 그것들은 던져도 상대 쪽에서 굉장한 효과음을 내며 파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알다시피 던져봐야 꼬불꼬불 날아가다 제풀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래선 대리가 안 된다. 맞다. 바로 그것이다. 이성미는 무엇을 대변할 수 있을지 몰라도 대리할 수는 없는 시인이다. 철저하게 여성의 문법을 간직하면서도 남성의 화법에 전염되지 않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어찌 보면 안채의 문화를 잃어버린 현대의 여성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잃고, 남성의 언어로 얘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말에 대해서는 따로 책임지겠다) 그들은 여성에 대한 얘기를 남성의 언어로 정치하게 말한다. 그러나 이 시인은 다르다. 그에게는 직선적이지만 오류투성이인 사랑채 언어가 아닌, 얼른 분명하게 다가오지는 않지만 그 내연의 폭이 큰 안채의 언어가 있다. 안채의 언어는 자기 욕망에 가장 충실한 언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시의 언어야말로 여성의 언어 아닌가? 모든 시인은 여성이다.
함성호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