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6일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 중단을 선언한 것은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와는 협상을 통해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에 따른 것이라고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진단했다. 지난해 3월 30일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렸던 북한 ‘청년학생’들의 결의대행진 모습. 동아일보 자료 사진
北‘핵 불능화 중단’ 성명 관련 美전문가 5人의 진단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은 26일 북한 외무성이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고 원상복구도 고려하겠다는 성명을 내놓은 데 대해 ‘조지 W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북한 비핵화 진전은 없다’는 종언(終焉) 선언이라고 평가했다. 전문가들은 “북한의 성명 발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결단이자 북한이 부시 행정부와 협상을 통해 더 얻어낼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린 데 따른 행동”이라며 “6자회담이 급속히 추동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본보는 찰스 프리처드 한미경제연구소(KEI) 소장, 데이비드 스트로브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한국연구소 부소장, 스티븐 코스텔로 프로글로벌 대표, 척 다운스 북한인권위원회 사무총장, 브루스 클링너 헤리티지재단 선임연구원 등 한반도 전문가 5명을 긴급 인터뷰했다.》
○ 부시 대통령 임기 내 더 진전은 없다
국무부 대북교섭전담대사를 지낸 프리처드 KEI 소장은 “부시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검증을 강조한 상황에서 검증방식에 대한 합의 없이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20년 이상 미 국방부 등에서 동북아시아 문제를 다뤄 온 다운스 사무총장은 “북한의 불능화 조치 중단 위협은 합의한 내용을 뒤집는 구습(舊習)을 되풀이한 것”이라며 “부시 대통령 임기 내에 북핵 문제 진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민간연구기관인 애틀랜틱카운슬에서 북한연구 책임자를 지낸 코스텔로 대표도 “북한으로서는 새로운 미국 대통령과 협상하겠다는 의지를 명백히 한 것”이라며 “단기적으로 북핵 불능화 및 신고에 대한 검증작업이 탄력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클링너 선임연구원은 “북한은 차기 미국 행정부 집권 초기부터 새 미국 대통령을 테스트하려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 6자회담은 안전한가
미 국무부 한국과장을 지낸 스트로브 부소장은 북핵 6자회담이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했다고 진단했다.
그는 “6자회담이 북한의 궁극적인 핵 포기 결단에 확신을 주지 못하고 있듯 나머지 5개국 역시 경수로 제공 등 북한의 요구를 들어줄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며 “모호함으로 가득한 6자회담이라는 틀이 최대 위기에 직면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리처드 소장은 당장 6자회담 틀이 깨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북한이 추가적인 상황 악화 조치로 영변 핵시설 주변에서 핵시설 복구를 추진하는 제스처를 취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 복구까지는 최소한 6개월에서 1년 이상의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북한은 영변 핵시설 가동 재개를 협상 재개용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 최후에 웃는 자는?
스트로브 부소장은 “늘 북한은 단기적인 관점에서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런지는 의문”이라며 “1990년대 이후 핵문제를 둘러싼 협상 과정에서 보여준 북한의 선택이 결과적으로 북한을 조금도 나아지게 하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투명하지 못한 협상 탓에 미국이 북한에 과도한 기대를 심어준 측면이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일부 나왔다.
다운스 사무총장은 “미국은 3월 베를린, 4월 싱가포르 북-미 회동에서 양자가 핵 불능화와 검증에 대해 어떤 합의를 했는지 밝히지 않고 있지만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무조건적 테러지원국 해제 등의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스트로브 부소장도 “시간에 쫓긴 부시 행정부가 일단 임기 내에 불완전하게나마 영변 핵시설의 불능화를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위해 북한에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점도 미국의 협상태도가 과연 옳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가 일어나는 대목”이라고 지적했다.
○ 북한이 선택한 ‘시점’은
코스텔로 대표는 북한이 성명 발표 시점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개막과 베이징(北京) 올림픽 폐막 직후로 택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북한 지도자와 직접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 용의를 밝힌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메시지를 던진 것이며 중국에는 올림픽 폐막 이후라는 시점을 택해 ‘재를 뿌리지는 않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하태원 특파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