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여자대표팀을 맡아 단체전 우승과 개인전 금-은-동을 모두 쓸어 담는 신화를 창조했던 장 감독도 이번 베이징올림픽에서의 극적인 금메달이 더 큰 기쁨을 안겨줬다고 한다.
한국양궁의 든든한 버팀목 장 감독을 베이징과 한국에서 두 차례 만났다.
장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유일하게 맛보지 못한 ‘올림픽 남자개인전 금메달’의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큰 일을 해낸 우리선수들이 자랑스럽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장 감독은 “남녀 개인전까지 금메달을 가져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목표와 희망이 생겼다”며 “이번 올림픽이 선수들과 지도자들을 자만에 빠지지 않게 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장 감독이 털어 놓은 베이징에서의 금메달 스토리를 공개한다.
1. ‘양궁은 무조건 금메달이다?’...부담감에 잠 못 든 신궁들
양궁은 대표적인 올림픽 효자종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메달 2개 이상은 기본, 싹쓸이도 충분히 노려볼만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선수들은 금메달을 따내야 한다는 엄청난 부담감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마인드컨트롤이 뛰어난 선수들인데도 금메달이 주는 부담 탓에 시합 전까지 잠을 이루지 못한 날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장 감독의 경우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단체전 결승전을 앞두고 7-8kg이 빠지기도. 장 감독은 “월드컵대회 2,3차 16강 탈락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는 상위 20개국의 실력차가 종이 한 장이라고 보면 된다. 여자는 한국선수들이 앞서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격차가 현격하게 줄어 이제는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고 말했다. 그런 뒤 “올림픽에 출전만 하면 금메달을 따낼 것이라는 팬들의 생각은 선수들을 더욱 잠 못 들게 만든다”고 깊은 속내를 털어 놨다.
2. ‘부러진 활 5개’…행운 or 불운?
대회를 앞두고 남자 선수들의 활이 잇따라 부러지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임동현은 월드컵에서 우승을 안겨준 활이 부러져 새 활에 익숙해지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박경모도 활이 2개나 부러지는 등 남자선수들은 올림픽을 한 달여 앞두고 무려 5개의 활을 교체해야 했다. 이에 대해 장 감독은 “활이 간혹 부러지긴 하지만 한꺼번에 활이 부러지기는 처음이다. 오랫동안 지도자생활을 해온 나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어 장 감독은 “부러진 활 5개가 남자단체전에 금메달을 안겨준 행운이라고 기분 좋게 해석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동현이가 월드컵에서 사용했던 활을 갖고 경기에 출전했다면 개인전도 우리가 가져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혔다.
3. 중국관중들의 응원 때문에 졌다?
양궁개인전이 열린 올림픽 삼림공원양궁장. 일부 중국관중의 방해작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는 것은 물론, 시위를 놓는 순간 고함을 질러 우리 선수들의 집중력을 떨어뜨렸다. 언론들도 한국의 은메달이 중국관중의 방해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장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은메달은 우리선수들과 지도자의 능력 부족 탓이지 관중들과는 상관 없다”는 것이 그의 설명. 이어 장 감독은 “우리는 모든 상황을 대비해 시뮬레이션 훈련을 소화했다. 날씨, 소음 등 모든 악조건에서 연습을 해왔기 때문에 패인을 다른 곳으로 돌려선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또 장 감독은 “여자개인전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중국의 장쥐안쥐안은 국제 대회에서도 정상급 성적을 냈던 선수다. 올림픽이라는 큰 쿠대에서 준결승 115점, 결승 110점을 기록했다는 것만으로도 금메달을 차지할 자격이 충분한 선수”라고 덧붙였다.
4. 개인전 은메달은 ‘몰래한 사랑’ 때문
박경모와 박성현처럼 차분하고 경험 많은 선수들이 개인전 결승에서 마지막에 흔들렸던 이유를 물었다. 장 감독은 “감독과 선수는 눈빛만 봐도 통한다. 특히 베테랑 경모는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기 때문에 어떤 생각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날 마지막에 보여준 플레이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질을 했는데도 아버지에게 금메달을 안겨줘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했던 것 같다”고 대답했다. 한국에 들어온 뒤 다시 장 감독과 이야기를 나눴다.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계속해서 “맞아, 맞아, 그런 문제가 있었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심리적인 부담은 예상을 하고 있었는데, (박)성현이까지 생각하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어떻게 감독인 나까지 속였는지 괘씸한 녀석들이다”며 웃으며 말했다. 또 장 감독은 “성현이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올림픽 2관왕 2연패에 대한 부담뿐만 아니라 경모에 대한 생각도 마지막에 영향을 줬을 것이다. 이렇게 심리적인 부분이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양궁이다”고 덧붙였다
5. 단체전 금메달의 비밀…‘선수촌에서 먹은 라면’
타지에서 오랫동안 머물 경우 음식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선수촌에서 나오는 음식도 훌륭하지만 한국사람은 한국음식을 떠나 살기 쉽지 않다. 세계최강을 자랑하는 양궁선수들도 마찬가지. 장 감독은 “한국음식이 그리웠는데 어느 교민이 건네준 조그만 버너와 라면이 큰 힘이 됐다”며 “숙소에서 종종 라면파티가 펼쳐졌다. 매운 라면이 있어 더 좋은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금메달의 숨은 비밀을 공개했다.
6. 남자 단체전 순서(임동현-이창환-박경모)의 이유와 이탈리아의 실수
선수들의 모든 기록과 특징이 전산화 된 한국대표팀은 대표팀 최종멤버가 확정되면 수 많은 시뮬레이션을 통해 최적의 조합을 찾아낸다. 단체전 순서도 선수들의 순서를 바꿔가며 테스트를 거친 끝에 최종순서를 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번 남자대표팀은 선수를 정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장 감독은 “강철심장인 동현이는 거침 없이 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1번이 제격이고, 쏘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실수가 적은 경모는 마지막에 어울린다. 창환이는 어느 곳에 놓더라도 제 몫을 해줘 2번에 배치했다. 이번처럼 빠르게 순서를 정한 적은 처음이며 연습에서도 이 조합에서 가장 좋은 점수가 나왔다”고 밝혔다. 장 감독은 한국 남자선수들의 순서를 이야기하면서 결승전에서 만난 이탈리아의 조합에 대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털어 놨다. 그는 “이탈리아의 선수들의 개인기량은 세계정상급이다. 하지만 선수들의 배치와 전술에서 약점을 드러냈다. 마지막 궁사 마우로 네스폴리가 이탈리아의 최대 기대주이인 것은 분명하나 그는 20세를 갓 넘긴 어린 선수다. 어린 선수가 올림픽 결승전에서, 그것도 동점 상황에서 높은 점수를 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네스폴리와 박경모의 능력차인 동시에 한국과 이탈리아 양궁의 차이점이다”고 말했다.
7. ‘배우고 싶은 후배’ 박경모
장 감독은 마지막 이야기의 주제로 박경모를 선택했다. “마지막 올림픽무대에서 개인전 금메달을 차지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을 텐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면서 장 감독은 “후배지만 ‘진짜 효자’ 박경모에게는 배울 점이 많다. 돌아가신 아버지 영전에 개인전 금메달까지 안겨드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국남자양궁을 올림픽 3연패로 이끈 기둥이며, 후배들에게는 믿음직한 맏형이었다”고 그를 치켜세웠다. 장 감독은 “뒤늦게 알게 됐지만 성현이와 금빛 가정을 꾸렸으면 좋겠다. 두 사람에게서 어떤 신궁이 태어날지 기대된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임동훈 기자 arod7@donga.com
[관련기사]양궁 남자개인 아쉽게 銀…허전한 광복절
[관련기사]“나는 졌지만 한국 양궁은 지지 않았다”
[관련기사]양궁 남자단체 순서의 비밀…선수들 성격·스타일 최우선 고려
[화보]폭우 속에서도 ‘신궁’…천하무적 女양궁
[화보]남자 양궁 단체전 ‘금메달 명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