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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덕 칼럼]공산당보다 더 나쁜

입력 | 2008-08-29 02:58:00


‘그루지야 사태’엔 그루지야가 없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것처럼, 작고 가난한 나라 기사보다는 러시아와 서방의 긴장과 갈등이나 신(新)냉전시대의 도래 같은 거시적 분석이 대부분이다. 그루지야보다 조금 큰, 그러나 미국 인디애나 주 크기밖에 안 되는 우리나라도 6·25전쟁 때 그렇게 그려졌을 성싶다.

누가 ‘역주행 정권’인가

1인당 국민소득은 4000달러가 채 안되지만 그래도 2년 전 세계은행이 매긴 기업 환경 지수(Doing Business)에선 112위였다가 올해는 18위로 뛰어오른 나라가 그루지야다. 우리나라는 2년 전 23위에서 30위로 역주행했다(조사 기간 2006년 4월∼2007년 6월). 그루지야에선 열흘이면 되는 창업이 우리나라에선 열흘 하고도 100일이 더 걸린다.

이 나라도 공산당 집권시절엔 부유층 휴양지로 날렸을 만큼 남부럽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한참 추락했다가 소련 공산제국으로부터 독립한 1991년 소득으로 겨우 회복한 수준이다. 역시 17년 전 소련에서 독립했고 지금은 ‘발틱 타이거’로 불리는 에스토니아의 소득은 1만6000달러나 된다. 63년 전 독립했고 한때 ‘아시아의 작은 용’으로 불렸던 우리나라와 큰 차이도 아니다. 저임금 저숙련 노동집약 제조업 수출주도 경제로 뼈 빠지게 달려온 길을 첨단 정보화 국가 ‘E스토니아’는 단숨에 날아온 셈이다.

‘왜 그루지야는 에스토니아보다 뒤졌을까’라는 논문이 있다. 아이슬란드대 경제학 교수 토르발두르 길프손의 분석인데 시장경제 개혁에서 처졌기 때문이라는 거다. 에스토니아는 독립하자마자 공기업 민영화, 모든 관세를 없앤 무역자유화, 세계 최초로 26% 단일세율 도입(1994년) 등을 단행했다. 요즘 좌파와 일부 지식인이 공산주의보다 증오하는 신자유주의식 개혁이다.

반면 그루지야는 초대 대통령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의 측근인사 낙하산인사 회전문인사와 이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패, 그리고 내전으로 ‘잃어버린 10여 년’을 보내야 했다. 그러니까 이 나라가 탈규제 민영화 자유화의 시장경제 개혁을 시작한 건 겨우 4년 반 정도인데 순식간에 우리나라를 추월했다는 얘기다.

물론 개혁에 반대가 없었을 리 없다. 에스토니아 야권은 지금도 끊임없이 빈부격차를 문제 삼는다. 소득이 늘고 빈곤이 줄어든 건 아랑곳하지 않고 무조건 격차가 나면 안 된다는 식이다.

2004년 초 취임한 미하일 사카슈빌리 그루지야 대통령은 거의 모든 경찰을 잘라버렸다. 신호등마다 뇌물을 요구하는 지긋지긋한 부패를 뿌리 뽑기 위해서다. 당연히 불만세력이 나올 수밖에 없다. 강압적이고 조급한 스타일도 반대파를 키웠다. 작년엔 시위대가 몰려나와 물대포를 쐈을 정도다. 그리고는 조기 선거를 실시해 올 초 재신임됐다.

2년 연속 최고의 개혁국가로 뽑힌 이 나라 대통령이 반대가 두려워, 퇴진요구에 겁을 먹고 꼭 필요한 개혁을 멈췄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전임 대통령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측근인사 낙하산인사 회전문인사에 부패도 마다하지 않았더라면?

고장난 불도저는 고철일 뿐이다

우리 같은 중간국가가 선진국으로 도약하기란 후진국이 중진국 되기보다 어렵다. 노벨상 수상 경제학자 등 전문가들이 모인 세계은행 성장과 발전위원회는 5월 대학교육과 연구개발, 민간투자에 힘써야 성장 모멘텀을 잃지 않는다는 보고서를 내놨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우리에게 제언한 해법 역시 규제개혁과 기업 하기 좋은 환경 조성, 그리고 감세와 재정지출 감축이다.

돈이 벌린다면 기업은 전쟁터도 누빈다. 우리나라가 농경사회가 아닌 다음에야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은 반드시 필요하다. 에스토니아에선 공산당도 반대하지 않았던 규제개혁을 이명박 정부는 균형발전이라는, 좌파 정권과 다름없는 논리로 마냥 늦추고 있다.

정부여당이 국민을 설득할 자신이 없고, 반대파에 맞설 용기도 없어 꼭 필요한 개혁을 얼버무린다면 직무유기를 넘어 배신이다. 촛불의 ‘ㅊ’도 무섭다는 듯 기업에 공격적 경영이나 당부하는 대통령은 ‘경제 살리기’를 말할 자격이 없다.

김순덕 편집국 부국장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