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의 르네상스인 중인/허경진 지음/399쪽·1만9000원·랜덤하우스
의사와 통역사, 과학자 그리고 필력을 인정받는 문인과 화가….
지금은 많은 사람이 선망하는 이 같은 직업들은 조선시대 중인들이 활동한 대표적인 영역이었다. 반상(班常) 구분이 엄격했던 조선 500년, 평민보다 높지만 양반에 오르지 못한 설움을 재능으로 발산한 중인들이 있었다.
한시와 고전문학을 연구해 온 저자는 조선시대 중인 가운데 문예부흥과 근대화를 주도한 지식인이 많았다며 이들을 ‘르네상스인’으로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조선 중·후기 중인들은 한양 인왕산 기슭에 문화공동체를 만들어 ‘위항문학(委巷文學·중인문학을 일컫는 말)’을 꽃피웠다. 요즘의 시문학동인 격인 시사(詩社)를 조직해 정기적으로 모여 시와 노래를 지어 불렀다.
시인 장혼이 주도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는 문인들 사이에서 모임에 초청받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추사 김정희가 송석원시사에 글씨를 써줬고 양반들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전문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사람도 많았다.
‘신필(神筆)의 화원(畵員)’ 김명국은 일본에 지금의 한류(韓流)와 같은 ‘조선풍(朝鮮風)’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이름을 떨쳤다.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 일본에 가서 그림을 그려 줬던 그는 일본 측에서 다시 초청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200년 동안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12차례 다녀왔지만 일본 측에서 다시 불렀던 화원은 그가 유일했다.
어머니 치료비 대신 의원 집 잡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침술을 배운 허임은 명의 허준과 함께 선조의 주치의 자리에 올랐다. 또 침을 놓아 말의 병을 고치다가 의원이 된 백광현은 종기를 침으로 째서 뿌리 뽑는 비법으로 이름을 날려 숙종 때 어의가 됐다.
역관(譯官)들은 대륙과 바다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홍순언은 중국에 건너가 ‘태조 이성계가 정적 이인임의 후사(後嗣·대를 잇는 자식)’라고 잘못 기록된 명나라 사료를 바로잡아 양국 간 가장 심각했던 외교 갈등을 해결했다. 역관이자 시인이었던 홍세태는 청나라 사신이 뇌물 대신 그의 시 한 편을 써달라고 요구할 정도로 이름을 날렸다.
“문과 출신보다 각계의 전문가가 대접받는 지금이 어쩌면 중인이 꿈꾸던 시대였는지 모르겠다”고 저자는 말한다.
조선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다양한 인물을 소개하는 책으로는 ‘기인기사’ ‘잡인열전’ 등이 있다.
‘기인기사’(푸른역사)는 조선 후기 문신 김우항 등 유명인들의 일화와 조선을 사랑해 귀화한 왜군 장수 등 별난 사람들의 사연을 소개한다. ‘잡인열전’(바우하우스)은 양반가문 자제로 투전판을 휩쓴 ‘천하제일의 타짜’ 원인손, 100번 넘게 과거를 대신 치러준 유광억 등 제도와 관습을 벗어나 욕망과 재능에 충실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조선의 프로페셔널’(휴머니스트)은 여행가 정란, 조각가 정철조 등 조선시대 프로 10명의 삶을 조명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