싹양배추 잎에 낳아 둔 큰양배추흰나비 알에 기생말벌이 앉아있다. 기생말벌은 몸길이가 0.5mm에 불과하다. 사진제공 PNAS
식물은 효소의 구조를 조금씩 바꿔 다양한 화합물을 만들어낸다. 알파-케톨이라는 휘발분자를 만드는 효소(AOS, a)의 137번째 아미노산 페닐알라닌(F)을 루이신(L)으로 바꿔주면 C12-알데하이드라는 휘발분자를 만드는 효소(HPL, c)로 바뀐다. 이미지제공 네이처
최근 개봉된 영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나도 똑같이 해주겠다는 말인데 야비한듯하면서도 사실상 사람들이 은연중에 하는 행동에 다름 아니다.
인류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안게 된 협력과 배반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전략이기 때문이다. 즉 상대방을 처음 만났을 때는 일단 협력을 하고 상대의 반응을 따라서 다음 번 태도를 결정한다. 만일 상대가 자신을 배반했다면 다음에 그와 일할 때 자신도 배반을 하고 협조했다면 다음번에도 협조적으로 나가는 것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남을 배려하는 사람이 이용당하기보다는 대체로 역시 호의적인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곤 한다. 특히 지속적인 관계일 때 그런 경향이 큰 것 같다.
동식물도 이런 전략을 즐겨 쓰는 듯하다. 최근 ‘미국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실린 논문은 식물이 자신을 찾을 동물이 풍기는 냄새를 식별해 이 전략을 쓰는 놀라운 사실을 실었다. 즉 찾아온 나비가 임신한 상태인지 아닌지 즉 알을 낳을 것인지 여부를 구분해 다음 행동(!)을 결정한다.
알을 낳지 않는다면 관계없지만 낳게 되면 애벌레가 잎을 갉아먹어 피해를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놓은 전략이 나비 알 속에 알을 낳는 기생말벌을 부르는 화학신호를 내보내는 것. 즉 임신한 벌레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를 감지해 기생벌을 부르는 냄새를 풍기는 ‘이에는 이’ 전략이다.
이 냄새를 감지한 기생벌은 식물로 다가와 잎 위에 낳아놓은 큼직한 나비 알속에 자신의 알을 낳고 떠난다. 나비 애벌레는 알을 깨고 나와 잎을 갉아먹으며 자라지만 얼마못가 몸속에서 자라고 있는 기생벌 애벌레에 내장을 뜯어 먹히고 결국은 미라처럼 껍질만 남은 채 죽고 만다.
그렇다면 왜 임신한 암나비는 멍청하게 냄새를 풍겨 자식들을 죽게 만들까? 사실 이 냄새(벤질 시아나이드)는 암컷과 짝짓기를 끝낸 수컷이 남긴 것이다. 이 냄새가 암컷의 매력을 떨어뜨려 다른 수컷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자기 씨를 퍼뜨리겠다는 ‘질투의 화신’ 수컷들의 전략이 자식들의 앞길을 가로막은 셈이다.
보통 식물은 뿌리가 땅속에 박힌 채 꼼짝달싹 못하고 동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희생자로 그려지곤 한다. 과연 그럴까? 정말 그랬다면 벌써 식물은 멸종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면 도심조차도 ‘사람’의 방해가 없는 한 진초록의 식물이 뒤덮고 있다. 게놈 분석 결과 식물은 동물보다 유전자가 20~30% 더 많고 대부분이 화합물을 합성하는데 관여한다고 한다. 현재 쓰이는 의약품의 절반 이상이 식물유래 화합물 내지는 그 변형 분자인 이유다. 수컷 나비의 어설픈 화학 전술이 화학 전문가인 식물 앞에서 농락당한 셈이다.
강석기 동아사이언스 기자 sukk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