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더릭 더글러스는 갓난아이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살아야 했다. 7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누군지 몰랐다. 아마 그의 ‘백인 주인’일 거라고 주변에서 쑥덕거릴 뿐이었다. 더글러스는 흑인 노예였다.
농장주는 노예가 가족과 보내는 시간까지 아까워했다. 여러 일터를 전전하던 더글러스가 12세쯤 됐을 무렵, 똘똘한 꼬마를 눈여겨본 안주인으로부터 알파벳을 배웠으나 곧 중단되고 말았다. 노예에게 글을 가르치는 일이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글눈 뜬 노예가 처지를 자각하고 자유를 갈망할까 두려웠을 것이다.
영민한 소년은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이웃의 백인 아이에게 글을 배웠고 어른이 쓰는 글을 유심히 관찰했다. 이내 글을 익힌 더글러스는 신문과 전단, 책에 새겨진 활자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문맹을 탈출한 소년에게 새 세상이 열렸다. 더글러스는 자유와 인권을 알게 됐고 노예제에 의문을 품었다. 농장의 주일학교에서 다른 노예에게 신약성서 읽는 법을 가르쳤다. 소문을 듣고 매주 40명이 넘는 학생이 비밀리에 찾아왔다. 그러나 6개월 뒤 들통이 나고 말았고 여러 농장주가 합세해 이 모임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문제 노예’로 찍힌 16세의 더글러스는 ‘노예 길들이는 사람’에게 보내졌다. 매일 두들겨 맞으면서 몸과 마음이 망가져가던 소년은 어느 날 힘으로 대항했다. 노예로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것이다.
1838년 9월 3일, 더글러스는 굴레를 벗어났다. 선원 옷을 입고 친분 있는 흑인 수병의 신분증을 빌려 기차에 올라탔다.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더글러스는 노예폐지운동을 벌이는 백인 윌리엄 개리슨을 만난 뒤 노예제 폐지 연설가로 명성을 얻었다. 1845년 출간한 자서전 ‘미국 노예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인생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도망친 노예라는 신분이 드러나 영국으로 건너갔다. 더글러스는 그곳에서 피부색을 따지지 않고 한 인간으로 대접해주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귀국해 노예 해방 운동 신문을 발간하고 남북전쟁 중에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에게 노예제 폐지를 건의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 해방을 위해 평생을 보낸 그는 진정한 노예 해방 운동의 선구자였다.
7월 워싱턴포스트는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선후보와 150여 년 전 더글러스의 독립기념일 연설을 비교 분석했다. 더글러스는 미국 땅에 존재하는 수많은 흑인노예를 언급하며 미국이 민주주의 실험에서 소외됐다는 점을 부각시킨 반면에 오바마 후보는 미국이 조국이며 독립기념일을 함께 기뻐할 시간으로 규정했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이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