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허담 비서는 1985년 9월 4일 오전 10시에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특사자격으로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한시해 수석대표, 안병수 노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직속과장, 여규채 주치의, 최봉춘 판문점 연락관이 수행했다.
남북한은 당시 정상회담에 적극적이었다. 1983년에 소련 전투기가 KAL기를 격추(9월 1일)하고 북한 공작원들이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전 대통령을 암살하려고 폭탄 테러(10월 9일)를 저질렀지만 대화를 모색했다.
남한의 수재가 물꼬를 텄다. 1984년 8월 31일부터 5일간 집중 호우로 190명이 숨지거나 실종되고 1318억 원의 재산피해가 났다.
북한적십자사가 9월 8일 구호물품을 보내겠다고 제의하자 대한적십자사가 6일 뒤 수용 의사를 밝혔다.
이를 계기로 1985년 5월 27∼30일 서울에서 제8차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평양에서의 제7차 본회담 이후 12년 만이다.
양측이 비밀 접촉 통로를 만들자는 의사를 타진한 뒤 판문점 ‘평화의 집’(7월 11일)과 ‘통일각’(7월 26일)에서 두 차례의 비밀회담이 이어졌다.
허 비서 일행은 서울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 11시 전 대통령을 만났다. 장소는 경기 시흥에 있는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의 별장이었다.
외부에 노출되지 않으면서 북한 대표단에 경부고속도로를 보여 주려고 고른 장소였다. 남한 대표단은 ‘영춘재(迎春齋)’라는 이름의 청와대 별장이라고 설명했다.
전 대통령은 평양에서 정상회담을 원한다는 김일성 주석의 친서를 전달받고 공감을 표시했다. 허 비서 일행은 6일 돌아갔다.
비밀접촉에 이어 남북한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이 9월 20∼23일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방문했다.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에서 30가족, 평양에서 35가족이 상봉했다.
장세동 안기부장(특사)과 박철언 수석대표는 수행원 3명과 함께 10월 16일 평양을 찾아가 이튿날 김 주석을 만났다.
북한 무장간첩선이 10월 20일 새벽에 부산 청사포 앞바다로 침투하려다 격침되면서 남북관계가 잠시 경색됐다. 하지만 비밀접촉은 꾸준히 계속됐다.
노태우 대통령 때 채택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1991년),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정상회담 합의(1994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첫 정상회담 개최(2000년)를 향한 발걸음이었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