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 나문희 씨(오른쪽)가 조재현 씨와 만났다. 그는 “소극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게 너무 행복하다. 연기만 자신 있으니까”라고 말했다. 김경제 기자
“한국의 어머니상? 싫진 않지만…”
"같이 작업하는 스태프나 배우들에게는 수 십 만원의 식사비를 아끼지 않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3500원짜리 이상 식사를 하지 않아요."
얼마 전 나문희 씨의 매니저 팽현승 씨의 말을 듣고 적지 않게 놀랐다. 그러나 선생님과 함께 작업을 하며 고개가 끄덕여졌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거침없이 하이킥' '천하일색 박정금'과 영화 '열혈남아'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이 작품들을 통해 선생님은 너그럽고 푸근하고, 게다가 친구처럼 가까운 어머니 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어쩌면 그냥 연기가 아니라 식사부터 옷차림까지 후배 연기자를 일일이 챙겨주는 생활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재현=오랜만에 무대에 서니까 부담스러우시지는 않나요?
▽나문희=처음에 대본 읽기는 좋았어요. 그런데 막상 연기를 하니까 발이 떨어져야지. 자존심은 있어서 아닌 척 했지만…
▽조=오랜만에 서니까 선생님 같은 배우도 손발이 어색하신가 봐요?
▽나=무대 공포증이 조금 있죠. TV에서는 소도구가 다 여기 있잖아. 그런데 연극에서는 없는 게 더 많고 내가 움직여서 만들어내야 하잖아요. 그런 게 어색해요.
▽조=직접 뵙기 전에는 드라마와 실제 이미지가 비슷할 줄 알았어요. 큰 착각을 한 거죠. (웃음) 오늘 의상만 해도 주황색 상의에 연두색 바지는 상상도 못했어요.
▽나='거침없이 하이킥'에서 많이 입었는데. (웃음) 평소 스타일도 경쾌한 걸 좋아해요. 정장보다는 캐주얼을 잘 입어요.
▽조=요즘 부쩍 한국의 '어머니' 상이라는 평들을 많이 들으시잖아요.
▽나=솔직히 그 평이 썩 맘에 들지는 않는데… 대한민국의 어머니가 다 '한국의 어머니' 아닐까요. 저만의 캐릭터를 갖고 싶어요.
▽조=그런데 선생님의 어머니상은 '전원일기' 김혜자 선생님의 '어머니' 상과는 다른 것 같아요. 김혜자 선생님이 참고 남편의 그늘 아래 있는 이미지였다면 나문희 선생님의 '어머니'는 인내하기도 하지만 자기 주장도 강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죠.
▲ 영상취재: 동아일보 사진부 유성운 기자
▽나=내가 1941년생인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대한민국의 어머니나 할머니들도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어요. 과거와 다른 장년 여성을 보여주고 싶은 거죠. 그래서 쳐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조=김혜자 선생님의 시어머니나 고모 역을 많이 하셨잖아요. 제가 명함 내밀기는 그렇지만 저도 최수종 씨가 주인공 할 때 건달 같은 주변 역을 많이 했어요. 섭섭함은 없으셨나요?
▽나=작은 역이지만 작다고 생각한 적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안 되는 역이라고 생각해서 맛있게 했고…
▽조=그러면서도 저는 5년 후의 최수종과 조재현 중 누가 잘 되나 보자는 마음이 있었어요.
▽나=나는 그런 건 없었어요. 그런데 '저 역을 날 주면 정말 기막히게 하겠는데, 하지도 못하는 저 친구를 왜 주나' 하는 아쉬움은 있었지. 그래도 잘 나서 여기까지 왔나봐. (웃음)
▽조=손숙 선생님이 '잘자요, 엄마'에서 델마 역으로 더블 캐스팅 되었는데 어떠신가요?
▽나=같은 무대에서 연기를 하게 되어 오히려 좋죠. 10년 전 델마 역을 연기했기 때문에 훨씬 더 능숙하죠. 연극무대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조=그래서 더욱 연습에 몰두하시나요.
▽나=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시간이죠. 남의 시간을 뺏는다는 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자세가 되어야죠. 관객이 표를 사서 왔을 때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연극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잖아요.
▽조=후배들에게 그런 모습들이 굉장한 모범이 됐을 것 같아요.
▽나=(손사레 치며)모범까지는… 지켜보는 후배들이 있으니까 실망을 안 주려고 열심히 살고는 있어요.
▽조=지금까지 만난 후배 연기자 중에 꼽을 만큼 인상적인 사람은 누군가요?
▽나=말 할 수 없어요. 내가 누구를 만났을 때는 그 사람이 항상 최고니까. 지금은 '잘 자요 엄마'를 같이 하는 서주희 황정민 씨만 생각해요.
▽조=이번에 선생님을 보면서 느낀 건 굉장히 치밀하고 연습을 많이 한다는 거에요.
▽나=저는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게 시간이에요. 남의 시간을 뺏는다는 건 그에 대한 책임을 질 자세가 되어야죠. 관객이 표를 사서 왔을 때 다른 데 신경 쓰지 않고 연극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리가 하는 일이잖아요. 또 많이 하다보면 연습량과 감성이 만나는 지점이 크게 다르지 않아요. 울어야 한다든지 웃어야 한다든지 모든 것이 연습을 많이 하면 그 안에서 놀게 되요.
▽조=저는 연극 제작도 하고 이것저것 하지만 역시 배우는 연기를 하는 게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나=내 생각이 그래, 그래서 난 인터뷰도 못해요.(웃음) 그저 소극장에서 관객과 만나는 게 너무 행복해요. 연기만 자신 있으니까.
"잠깐 차 세우고 밖을 좀 봐. 저기 노을이 너무 예쁘지 않니?"
매니저가 들려준 또 다른 일화다. 온종일 촬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일 때도 선생님은 노을과 잠자리에 감격하며 감상에 젖는 분이라고 한다. 연기와 감성이 함께 어우러지는 지점을 발견하신 선생님에게는 하늘의 노을처럼 세상의 모든 것들,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들이 연기로 표현된다.
그런 '어머니' 배우를 둔 우리는 참 행복하지 않은가. 여전히 활력 있고 연기와 후배에 애정이 넘치시는 선생님을 보면 한 사람의 배우로서, 관객으로서 언제나 고마울 뿐이다.
11월 2일까지. 서울 대학로 원더 스페이스 네모극장. 02-763-1355
정리=유성운 기자 polaris@donga.com
▲ 영상취재: 동아일보 사진부 유성운 기자
● 나문희씨는…
△1941년 서울 출생
△창덕여고 졸업
△MBC 라디오 1기 성우 공채(1961년).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거침없이 하이킥’ ‘천하일색 박정금’, 영화 ‘열혈남아’ ‘권순분 여사 납치사건’ ‘걸스카우트’ 등 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