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는 사막 땅이다.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나일강만이 유일한 수원(水源)이다. 오아시스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문명의 거름이 될 만큼 충분한 수원은 되지 못한다. 사막을 관통하는 나일 강. 그 모습이 몹시도 궁금했다. 여러 사막을 가봤어도 나일처럼 사막을 적시는 강은 아직 본 적이 없었다. 바닷가의 사막도시 두바이에 비슷한 것이 있기는 있다. ‘두바이 크릭’(도시의 내륙 깊숙이 파고든 물길)이라는 수로다. 하지만 흐르는 강이 아니다. 만(灣)처럼 갇힌 바다다.
나일 크루즈가 시작됐다. 크루즈보트에서 첫 밤을 보내고 맞은 아침. 아침 햇살이 찬란히 내리쬐는 4층 갑판에서 나일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온통 황무지의 대지 한가운데서 강안만 초록으로 빛났다. 초목이 우거지고 팜 트리가 그늘을 드리우고 농부가 풀 뜯는 소와 염소와 어울리는 사막의 파라다이스였다. 가끔 농가도 보이고 물가에는 뛰노는 아이들도 보였다. 나일의 랜드마크는 펠루카(사진)다. 요트처럼 생긴 전통 목선인데 삼각돛에 바람을 가득 안고 강상을 미끄러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헤엄치는 것이 힘겨워 보이는 소의 고삐를 잡고 노 저어 강을 건너는 풍경도 보였다.
룩소르와 아스완 사이의 나일 강에는 보(堡)가 가로놓여 있다. 보를 사이에 둔 상·하류 강물의 수위 차는 7∼8m. 크루즈보트는 갑문으로 보를 통과하는 데 1시간이나 걸린다. 갑문 안에 배를 가둔 채 물을 넣어 수위를 맞추고 배가 나가면 다시 물을 빼 수위를 낮추는 작업 때문이다. 그날 갑문이 설치된 에스나에 도착한 크루즈보트는 10여 척. 내가 탄 라1호는 오전 10시경 도착해 자정경에야 통과했다. 무려 14시간이 걸렸다.
그 14시간. 무척이나 달콤한 휴식을 즐겼다. 그것도 강상의 호텔에서. 그 사이에 강상에서는 희한한 풍경이 펼쳐진다. 나일 크루즈 관광객을 상대로 물건을 파는 현지 행상이 주인공이다. 작은 배를 저어 접근한 이들. 다짜고짜 돌돌 말아둔 티셔츠를 4층 옥상 높이의 갑판에 던진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원(one) 달러. 실제는 이보다 비싸다. 그러나 흥정은 이렇게 붙인다. 4층 높이의 갑판과 수면 사이의 공중을 오가며 이뤄지는 흥정. 나일강의 진풍경 중 하나다.
갑판은 늘 선탠을 즐기는 유럽 여인들로 붐빈다. 반라의 모습으로 선 베드에 누워 휴식하는 이들. 사방을 둘러봐도 황무지와 강물뿐인 나일과 잘 어울린다. 나도 열대과일이 든 칵테일을 홀짝이며 망중한을 즐겼다. 기막힌 사막의 휴식이 아닐 수 없다.
물은 낮은 곳을 향해 흐른다. 나일 강 역시 같다. 에티오피아 고원에서 발원한 강은 지중해를 향해 북으로 흐른다. 그 거리가 6650km. 하구에 이르면 외줄기 물길은 부채살처럼 여러 갈래가 된다. 그 모습, 꼭 연줄기의 연밥을 닮았다. 연꽃은 고대 이집트에서도 ‘생명의 재탄생’을 의미했다. 나일 강은 모양도 그렇지만 사막에 생명을 준 점에서 그 자체가 연꽃이다.
나일 강의 범람. 이제는 없다. 1970년 하이 댐 축조 후 사라졌다. 그러나 범람을 막은 것이 꼭 기능적인 것은 아니다. 실트가 쌓이지 않아 토양 비옥도가 떨어진 것이다. 나일 강에서 비료를 쓴 것도 그때부터다. 수많은 유적의 수몰도 그렇다. 유네스코와 이집트 정부가 구제에 나섰지만 31개 신전에 그쳤다. 아부심벨과 댐 부근 섬의 필레 신전이 그것이다.
아스완에 도착하자 하이 댐부터 찾았다. 인공호수 나세르는 거대한 바다처럼 넓고 컸다. 작은 보트로 아길키아 섬을 찾았다. 수장 위기에 몰린 필레 신전을 옮겨둔 곳이다. 필레 신전은 생명의 여신 이지스를 모신 사원. 고대 이집트는 물론 그리스 로마제국 시대에도 널리 추앙받던 여신이었던 만큼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신전 이전 과정도 얘깃거리다. 신전이 있던 곳은 필레라는 섬이었다. 그 섬이 수장될 운명에 놓이자 이전 계획을 세웠는데 문제는 ‘최소 10년’이라는 소요 기간이었다. 그래서 이집트 정부와 유네스코는 1970년부터 섬 주변에 댐을 쌓아 물을 막았다. 그러면서 유적을 해체했다. 그 돌이 모두 4만 개. 각각 번호를 붙여 옮긴 뒤 조립해 복원하는 방식으로 신전은 이전됐다. 꼬박 10년이 걸린 대역사였다.
이집트=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2000년 전 헤로도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로 상징되는 이집트. 누구나 생각한다. 죽기 전에 반드시 가봐야 할 곳으로. 그런 생각은 2000년 전에도 같았다.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도 나처럼 피라미드를 찾았다.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인 로마제국의 안토니우스는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프랑스의 정복자 나폴레옹은 더했다. 그는 아예 피라미드 안에서 하룻밤을 유숙했다.
인류 최고의 유적 피라미드. 그렇지만 실상은 다른 유적에 비해 호기심이 덜 간다. 하도 많이 보고 들어서다. 현장에 서자 실망이 앞섰다. 규모(높이 137m, 밑변 230m)가 상상보다 작아서다. 혼자 생각으로는 두 배쯤이었다. 위치도 그렇다. 북적대는 도시와 맞닿았다. 복잡한 도로의 차창으로 다가온 피라미드가 그 신비로움을 단숨에 앗아갔다.
가차 없이 대지를 달구는 사막의 땡볕, 행상의 호객 소음, 관광객용 낙타몰이꾼, 엄청난 인파에 떼밀려 오가는 유적투어…. 즐거운 표정보다는 짜증 섞인 얼굴이 더 많다. 그러나 어쩌랴. 이 정도 고생은 ‘입장료’다.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보자면 치러야 할 최소한의 수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라미드와 첫 대면은 감동이었다. 사막의 황무지 언덕에 4600년 동안 서 있다는 사실, 그리고 인류가 세운 건축물 가운데 최대 규모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기자의 피라미드는 세 개다. 쿠푸왕의 대피라미드, 그의 아들인 카프레왕의 피라미드…. ‘세계 7대 불가사의’(고대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 남은 빛나는 유적이다. 스핑크스(높이 20m, 길이 70m)는 그 언덕 아래에 있다. 현존하는 조상 가운데 가장 크다.
입장료는 피라미드마다 받는다. 쿠푸왕의 피라미드 앞. 2.5∼3t쯤 되는 직육면체 돌 230만 개로 쌓아 올린 이 무덤을 사람들이 걸어서 올랐다. 그러나 세 단이 한계다. 그 위에 굴 형식의 입구가 보였다. 별도 입장권을 미리 사야 들어갈 수 있다. 피라미드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 감상과 사진 촬영뿐. 햇볕이 하도 뜨거워 가이드의 설명은 뒷전이다.
카프레왕의 피라미드로 가려면 차를 탄다. 여기서는 지하 통로로 내부에 들어갔다. 구부린 자세로 한참이나 경사로를 내려가 살핀 지하 방. 아무것도 없다. 어떤 설명도 없다. 벽에 쓰인 ‘벨조니’라는 단어가 전부. 19세기에 활동했던 이탈리아 탐험가다.
피라미드는 오히려 멀리서 봐야 제격이다. 세 피라미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중턱 전망대. 관광용 낙타 수십 마리가 어지럽게 서 있다. 낙타 등에 올라 피라미드로 향하는 관광객 모습도 끊임이 없다. 최근 이집트 정부가 펜스를 설치해 낙타 출입을 막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풍경도 앞으로는 더 이상 볼 수 없다.
사막의 밤. 기온은 뚝 떨어져 긴팔 옷을 찾을 정도다. 그래서 사막에서는 밤이 낮을 대신한다. 카이로 시내가 사람들로 북적대는 저녁. 피라미드가 있는 기자는 또다시 관광객으로 붐빈다. 조명과 음향, 거기에 설명을 곁들인 환상적인 ‘사운드 앤드 라이트’ 쇼의 관람객이다. 한 시간 동안 빛과 소리로 연출해 보여주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그리고 이집트 역사. 몇 시간 전 피라미드 앞에서 느꼈던 실망감이 일순 사라진다. 빛과 소리에 실려 색다른 모습으로 비춰지는 4600년 역사와 피라미드. 인류문명의 시금석이 된 이집트 역사를 다시금 음미하기에 충분히 멋졌다. 반드시 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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