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마리 ‘사마귀’ 같았다. 짧은 머리 위로 선글라스를 올려 쓴 채 나타난 이 디자이너에게는 보이지 않는 더듬이가 수십 개 달린 듯했다. “새로운 것이라면 무조건 즐겁다”는 그. 왜 더듬이가 무성한 사마귀가 됐을까.
“내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일은 바로 ‘공상’이죠. 레이더망에 들어온 것들의 색깔과 느낌을 기억하는 것. 어느덧 숨쉬는 것만큼 일상이 됐죠. 때로는 공상하다 잠 못 잘 때도 많아요.”
이스라엘 출신의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이자 ‘L-디자인’ 대표인 아릭 레비(45·사진)와의 인터뷰는 ‘이미지 게임’을 하듯 시작부터 쫀득쫀득했다. 랑방, 까르띠에 같은 패션 브랜드에서 로레알, 르노자동차, 파리 루브르박물관과 오르셰미술관의 사인보드 디자인까지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그가 이번엔 프랑스 보석 브랜드 ‘프레드’의 매장 조명을 디자인했다.
지난달 21일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에비뉴엘 프레드 매장에서 만난 그는 “수십 개의 구멍에서 빛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습은 많은 이들과 소통하는 우리 모습과 같다”고 말했다. ‘테크노 시인’이라 불리는 그의 최고 화두(話頭)는 인간, 그리고 감성이다.
“감정이 뒷받침되지 않은 디자인은 의미가 없습니다. 전원을 켜지 않은 TV가 단순한 검은 물체에 불과하듯이 말이죠. 그래서 전 디자인과 키스한다는 느낌으로 일을 한답니다.”
필리프 스탁, 론 아라드와 함께 세계 3대 산업 디자이너로 꼽히는 그는 어릴 적 난독증으로 재미난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수 없었다. 나무를 자르다 왼쪽 검지가 잘리는 사고도 당했다. 하지만 그는 “독서 대신 ‘공상하기’가 취미였고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했다.
1991년 ‘세이코 엡슨 국제 디자인 경연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받은 그는 한국 기업들과 인연이 깊다. 행남자기의 주방용품 ‘아릭레비 by 행남’부터 LG생활건강의 화장품 용기, 코오롱스포츠의 아웃도어 의류 ‘트랜지션’ 라인까지 지속적으로 한국 기업들에 디자인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20년 전 한국산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산 뒤부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됐다는 그는 한국을 ‘물’에 비유했다.
“한국만큼 사람들이 열정적이고 다양한 곳도 없죠. 마치 그릇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는 물처럼…. 한국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요. 그래서 제2의 고향이나 다름없어요. 일본이나 중국 기업에서도 작업 제안이 들어오지만 그저 한국뿐입니다.”
그런 그도 꼭 한번 디자인해보고 싶은 한국문화가 있다. 바로 ‘교통’. “17층 호텔에서 내려다보면 도로가 하도 복잡해 나갈 엄두가 안 난다”는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걷다가 앉아 쉴 수 있는 여유로운 거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9개의 손가락을 펼쳐보이며 열정을 보인 이 테크노 시인. 그는 어쩌면 하루하루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음엔 ‘사랑’을 갖고 디자인해보고 싶어요. 손가락 하나 없어도 잘 할 수 있어요. 내 머리 위에 돋아난 수십 개 더듬이가 있으니까요.”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