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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com]“200번도 넘게 오디션 물먹어 봤죠”

입력 | 2008-09-05 03:00:00


남자모델 해외진출 1호 김영광-윤진욱

영광이와 진욱이. 영광이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친구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느라 여념이 없었고 커다란 헤드폰을 쓴 진욱이는 엄지손가락으로 아이팟 ‘휠’을 돌리느라 바빴다. 영광이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오늘 인터뷰 진짜 하는 거예요?”라며 웃었다. 소년 같았다.

지난달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 인근에서 만난 두 사람. ‘롤 업’ 청바지, 목이 깊게 파인 티셔츠, 컨버스화가 어울리는 영광이, 재킷이나 셔츠, 구두가 몸에 붙는 진욱이. 훑고 또 훑어도 두 사람의 DNA는 좀처럼 겹치지 않는다.

하지만 뭔가 통하는 게 있는 듯 이들은 인터뷰 내내 서로 바라보며 킥킥댔다. 그 교집합은 바로 프랑스 파리와 이탈리아 밀라노 패션쇼였다. 추운 겨울 파리에서 새벽부터 오디션을 기다리던 순간, 밀라노 한복판에서 돈이 떨어져 주린 배를 움켜쥐었던 고통, 반나절 기다린 오디션장에서 1분 만에 “나가봐” 면박당했던 쓰라린 기억….

와신상담(臥薪嘗膽). 김영광(21)은 지난해 밀라노 ‘에트로’ 패션쇼를 시작으로 올해 ‘비비안 웨스트우드’, ‘알렉산더 매퀸’, ‘에비스’ 등 밀라노 패션쇼에 3시즌 연속 진출했다. 올해 6월에는 동양인 최초로 파리 ‘디오르 옴므’ 무대에도 섰다. 윤진욱(23)도 밀라노의 ‘보테가 베네타’, 파리의 ‘랑방’ 패션쇼 무대에 서며 ‘코리안 파워’를 세계에 알리고 있다. 이들은 한 배를 탔다. 영어 과외, 연기 수업 모두 함께다. 때로는 얼큰한 김치찌개 같은 동료로, 때로는 매서운 눈빛을 뿜어대는 라이벌로…. 하지만 혜박, 한혜진, 강승현 등 국내 여성 모델들이 해외에서 입지를 굳힌 것에 비하면 이들은 ‘이제 시작’이다. 그래도 좋다. 젊으니까.

○ 윤진욱 “파리 밀라노 접수…다음은 뉴욕”

▽김영광(김)=달라진 거요? 좀 영리해졌다는 것. 처음엔 ‘어어∼’ 할 뿐이었는데 어느덧 적당히 부담감도 생기더군요. 아, 달라진 거 또 있다. 바로 ‘뷔페’요. 하하. 국내에서는 2000원짜리 도시락으로 해결하는데 해외에선 근사한 뷔페를 차려주더군요.

▽윤진욱(윤)=해외에서 수많은 모델과 경쟁하다 보니 ‘나’에 대해 탐구하는 자세가 생겼어요. 뭐가 부족하고 뭘 공부해야 하는지…. 영어 과외, 연기 수업까지 받게 됐죠.

―눈 찢어진 동양 모델이 각광받는 시대죠. 어쩌면 시대를 잘 타고 난 것 같지 않나요?

▽김=유행 때문이죠. 과거엔 이종원, 차승원 선배님같이 터프한 근육질 모델이 우리들의 표상이었는데 지금은 스키니진이 패션 아이콘이 됐잖아요. 하지만 10년 전이건 20년 전이건 지금처럼 똑같이 도전했을 것 같아요. 세계 최고가 될 때까지….

▽윤=요즘 모델들은 근육 키우지 않지만 전 반대로 근육질 몸매를 갖고 싶어요. 그래서 ‘돌체앤가바나’ 패션쇼에 서는 게 목표예요. 그 패션쇼 오디션장에는 아예 남자 모델들이 전부 웃통을 벗고 있을 정도니까요.

―국내에서는 톱모델이지만 해외에서는 신인급인데….

▽김=한국 모델이라고 하면 다들 “남이냐 북이냐”부터 물어요. 해외 나가면 동양모델은 그냥 동양모델 원, 투, 스리인 셈이죠. 전 함께 묶이기 싫어서 아시아 모델들과 우르르 몰려다니지 않아요.

○ 김영광 “모델생활 매일 고민 그러나…”

만화방 주인이 꿈이었던 김영광은 3년 전 아르바이트 ‘뒤통수 모델’로 데뷔했다가 모델의 길에 들어섰다. 패션디자인학과 학생이었던 윤진욱은 디자이너 홍은주의 피팅 모델을 하면서 데뷔했다. 이들은 국내 남자 모델 40년 역사상 처음으로 해외 진출 신호를 쏘아 올렸다. 1960년대 국내 남자모델 1세대들의 키가 175cm 정도였던 데 비하면 187cm의 김영광, 186cm의 윤진욱은 서구화 식습관이 만들어낸 ‘신인류’임에 틀림없다. 호리호리한 몸매와 작은 얼굴도 한몫 거든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200번 넘게 오디션에서 떨어져도 좌절하지 않는 든든한 ‘맷집’이 있었다. 2007년 제대한 윤진욱은 2년간 군 복무를 하며 감(感)이 떨어질까봐 내무실을 런웨이 삼아 워킹 연습을 하다 선임병에게 혼나기도 했다. 좌절은 사치였다. 어느덧 국가대표 남자모델이 된 지금, 진정한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윤=한국에서 남자 모델을 얼마나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길어야 10년이라고 하죠. 설 수 있는 무대도 여자 모델의 절반도 안 돼요. 보수도 차이 나고 ‘한때’ 직업으로 여겨지죠. ‘변했다’, ‘외도했다’ 비판을 받더라도 부업 하나는 필수고, 좀 뜬다 싶은 남자 모델은 으레 연예계로 진출해요. 어쩌면 해외에 진출하려는 것도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닐까요?

―모델이 된 것을 후회하나요?

▽김=하루에도 수십 번 고민합니다. 하지만 결국 자신과의 싸움일 뿐이죠. 한참 생각하다 그냥 잊어요. 무대에서 스트레스를 풀죠. 걸으면서 속으로 ‘다 죽여버리겠어’라며….

▽윤=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인내심을 가지라고. 몇 시간 기다려 단 1, 2분 오디션 보는 것도 과정이니까요. 공허함도 즐길 줄 아는 모델이 됐으면 해요.

이들의 다음 목표는 미국 뉴욕 무대. 같은 곳을 바라보는 두 사람. 라이벌 의식도 있었다. “진욱이 형은 뭐든 열심히 해서 짜증난다”(김), “내가 형이라 영광이에게 예쁜 옷을 많이 양보한다”(윤) 식의 유쾌한 신경전을 펼치는 이들에게 각자의 삶을 점수로 말해달라고 했다. 두 사람 모두 50점. 가혹한 반타작이었다. 이유도 같았다. “제대로 뜨려면 아직 멀었다”고.

소년에서 어른이 되려는 이들에게 세상은 여전히 두렵다. 하지만 이 ‘20대 소년’들은 시종일관 웃기만 한다. 그것이 젊음이다. 한국 남자 패션모델의 미래다. 그 웃음을 물려받을 후배를 위해.

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