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밀려 궁지에 몰리게 된 독일의 히틀러에게 한 편의 영화가 전달됐다.
지상에서 발사된 길이 14m, 무게 125t의 거대한 로켓이 100km를 넘게 날아가는 모습을 영화로 본 히틀러는 “6년만 일찍 개발됐었더라면…” 하며 가슴을 쳤다고 한다.
히틀러는 즉각 탄두만 980kg인 이 거대한 로켓을 만들 대규모 공장을 짓도록 지시했다.
그로부터 2개월여가 지난 9월 8일 이 거대한 로켓이 영국 런던 하늘에 나타났다. 단 한 대의 폭격기도 보이지 않는 하늘에서 거대한 폭탄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본 런던시민들은 경악했다.
보복무기(Vergeltungswaffe) 2호의 머리글자를 따 ‘V2’로 명명된 이 로켓은 이후 6개월여 동안 3000여 발이 발사됐고 런던을 포함한 연합국 주요 도시 시민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대형 트럭을 이용한 이동식 발사대에서 쏘아지는 데다 당시로는 요격이 불가능한 시속 5760km의 속도로 날아오는 V2 로켓에 연합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V2 로켓의 명중률이 매우 낮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은 목표 지점에서 몇 km씩 떨어진 지점에 떨어졌고 런던으로 발사된 V2 로켓 중에는 해협을 건너지 못해 바다에 떨어진 것도 적지 않았다.
V2 로켓의 비싼 생산비용은 오히려 독일군의 골칫거리가 됐다. V2 로켓 한 발의 제조비는 전투기 한 대의 제조비와 비슷했다.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독일이 만든 V2 로켓은 6000여 발로 탱크 4만8000여 대를 만들 수 있는 비용이 V2 로켓 제조에 들어갔다.
1945년 전쟁이 끝났지만 V2 로켓의 주가는 떨어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미국과 소련은 V2 로켓 개발 연구원과 발사되지 않은 V2 로켓 확보 경쟁에 나섰다.
미국은 V2 로켓 개발자인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를 포함해 126명의 주요 연구원을 수백 발의 V2 로켓과 함께 미국으로 데려갔다.
소련으로 압송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군에 붙잡힌 브라운 박사는 1950년부터 미국 육군병기공장의 유도탄 연구 기술부장으로 장거리로켓을 연구했다. 1960년부터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소속돼 아폴로계획을 포함한 우주개발계획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덕분에 V2 로켓에 사용된 엔진구조와 유도제어 기술은 아폴로 우주선인 새턴 5호에 이용될 수 있었다. 소련도 V2 로켓 발사 연구원과 V2 로켓을 확보한 덕분에 소련 최초의 미사일인 R1을 만들어냈다.
이현두 기자 ruch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