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윤발처럼 보이고 싶다” 남학생 트렌치코트 붐
여학생들은 장국영 대형사진 붙여놓고 대리만족
피를 흘리며 쓰러진 주윤발(周潤發). 암흑가의 보스였던 적룡(狄龍)은 배신자를 처단한 뒤, 경찰인 친동생 장국영(張國榮)의 수갑을 빼앗아 제 손목에 철컥 채운다. 당혹스러워하는 동생에게 결연한 목소리로 말하는 형.
“우린 서로 길이 달랐던 거야. 네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이지. 나도 이젠 바른 길로 돌아가고 싶어. 늦지 않았길 바라.”
아! 이것이 바로 사나이들의 세계인 것을…. 이 순간, 장국영이 부르는 주제가 ‘당년정(當年情)’이 흘러나오면서 영화는 막을 내린다.
“행행시우센조이와이오송완뉜(輕輕笑聲在爲我送溫暖·작은 웃음소리에도 따스함을 느끼고)….”
한국의 30, 40대라면 마음속 영원한 로망으로 남아 있는 홍콩 누아르 ‘영웅본색(英雄本色)’. 1986년 작인 이 영화는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남학생들은 주윤발처럼 보이고 싶다며 아버지의 트렌치코트를 입고 나와 성냥개비를 죽어라 씹어댔다. 여학생들은 동네 문방구에서 구입한 장국영 대형 브로마이드를 방 안에 붙여놓고 아침마다 “오빠, 나 학교 다녀올게”라고 인사를 건넸으니 말이다.
이듬해엔 장국영, 왕조현(王祖賢) 주연의 ‘천녀유혼’이 나왔는데, 쾨쾨한 동시상영관에 앉아 ‘영웅본색’과 ‘천녀유혼’을 헐값(?)에 연달아 보는 기쁨과 감동이란! 지금으로 치면, 김태희와 전지현을 동시에 사귀는 기분이랄까?
전설의 영화로 남아 있던 ‘영웅본색’이 최근 국내 일부 극장에서 재상영되고 있다. 향수도 곱씹을 겸 20여 년 만에 다시 상영된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아, 세월이 흘렀건만 ‘영웅본색’ 속엔 영웅이 진정 갖춰야 할 풍모와 덕목이 여전히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먼저 이 영화는 영웅이 되려면 모름지기 그럴듯한 한마디를 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영웅의 한마디는 서정적이어야 한다. 과거 자신이 아끼던 후배에게 배신당하고 오히려 두드려 맞은 주윤발. 피범벅이 된 얼굴로 산에 오른 그는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비친 홍콩을 쳐다보며 이렇게 말한다.
“홍콩의 야경이 이렇게 아름다운 줄 몰랐어.”
아, 영웅은 시인인가. 영웅은 때론 대책 없는 센티멘털리즘이 있어야 한다. 배신자 무리와의 마지막 대결을 앞둔 시점, “너는 신의 존재를 믿어?”라고 묻는 적룡에게 주윤발은 또 이런 답을 하는 것이다.
“믿어. 내가 바로 신이거든. 자기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이지.”
그렇다. 영웅의 한마디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면서도 결코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어야 한다. 상투적인 듯 창의적이어야 한단 얘기.
☞여기서 잠깐
영웅의 활약상을 그린 최근 영화 중 창의적 대사가 돋보인 영화는 류승완 감독의 ‘다찌마와 리-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였다. 영화 속 주인공 다찌마와 리(임원희)는 이런 ‘뻐꾸기’를 날리며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조국과의 사랑을 배신한 너는 간통죄야!” “이제야 내 마음이 재건축되어 마음 한구석에 새로운 세입자를 받을 여유가 생겼건만….”
그러면 영웅은 말로만 되는가? 아니다. 영웅은 저 스스로를 알리는 ‘셀프 마케팅’ 감각이 있어야 한다.
주윤발을 보라. 눈알이 비치지 않는 새까만 선글라스는 영웅이 가진 백 척 깊이의 속마음을 남들이 도무지 짐작할 수 없도록 만든다. 시도 때도 없이 씹어대는 성냥개비는 그가 어떤 경우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냉정한 킬러임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작렬하는 쌍권총은 그가 정통 서부극 속 외로운 총잡이를 현대적으로 변주해낸 캐릭터임을 말해준다. 무채색 트렌치코트는 그가 심장 안에 남모를 회한을 운명처럼 품고 다니는 남자임을 암시한다(사실 갱들은 트렌치코트를 선호한다. 옷 안에 각종 무기들을 숨기고 다니기에 용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영웅은 심각해하질 않는다. 영웅들은 의외로 심플하고 천진난만하다. 거사를 앞두고도 주윤발은 길거리에서 파는 불량식품(떡꼬치 비슷한 거)을 사 먹으며 해맑게 웃고, 친형제 사이인 적룡과 장국영은 서로를 간질이면서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주윤발 이상으로 자기 마케팅 능력이 뛰어난 영웅으론 ‘007 제임스 본드’가 있다. 그는 여성들에게 자신을 기억시키는 절묘한 상징물을 창출해 냈으니, 바로 그가 마시는 술이다. “무슨 술을 드시겠어요?”란 질문에 본드는 늘 이렇게 대답하면서 고상한 취향을 은근슬쩍 과시한다. “보드카 마티니 한 잔, 젓지 말고 흔들어서….”
게다가 샴페인도 늘 ‘동 페리뇽 53년 산’만을 고집한다. 샴페인 병으로 자신을 공격하는 악당을 처치한 뒤에는 “동 페리뇽을 마실 줄 아는 자가 악당이었다니, 이럴 수가…”(‘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년)라고 말할 정도.
그렇다. 영웅은 취향도 매혹적이어야 한다. 아마도 ‘영웅본색’ 속 주윤발이 2008년 9월 서울의 한 스타벅스 지점에 들어섰다면 이렇게 주문하지 않을까?
“에스프레소, 더블 샷으로!”
※1980년대의 ‘맛’을 살린다는 취지로 칼럼 속 인명을 ‘주윤발’ ‘적룡’ ‘장국영’ ‘왕조현’으로 표기했습니다. ‘저우룬파’ ‘디룽’ ‘장궈룽’ ‘왕쭈셴’이 각각 올바른 표기입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