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미국 일본의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들은 지난주 일제히 베이징으로 달려가 사흘 동안 머리를 맞댔다. 북한이 핵 불능화 중단 선언에 이어 핵시설을 복구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북핵 폐기 절차가 또다시 위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북한 수석대표 김계관은 끝내 베이징에 나타나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힐을 비롯한 3국 수석대표는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을 만나 중재를 요청한 뒤 하릴없이 발길을 돌렸다.
▷북한은 핵 폐기를 다짐한 9·19 공동선언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6자회담 파트너들을 깔아뭉갰다. 이쯤 되면 북한에 불쾌감을 표시하고 강경 대응을 하는 게 정상인데 미국의 태도는 부드럽기만 하다. 힐은 “북한의 현재 핵 활동을 검증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향후 핵 프로그램 검증에 대한 규정을 만들자는 것”이라며 북한 달래기에 나섰다. 그는 북한이 영변 핵시설 봉인을 제거하고 핵시설 복구에 나섰다는 미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핵시설 재가동 시도 징후는 명확하지 않다”고 대응했다. 미국이 왜 이럴까.
▷존 볼턴 전 국무부 차관이 궁금증을 풀어준다. 그는 6일 월스트리트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현재 워싱턴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유산(遺産)을 남기기 위한 광풍이 불고 있다며 대표적 사례로 북핵에 대한 미온적 대응을 꼽았다. 미국은 외교적 성공 사례로 생각하는 북핵 문제를 악화시키지 않기 위해 양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볼턴은 북한이 부시 행정부의 심리를 간파하고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를 얻어내기 위해 불능화 중단 카드를 꺼냈다고 진단했다.
▷힐은 대표적 대북(對北) 협상가인 반면 볼턴은 손꼽히는 대북 강경론자다. 볼턴의 눈에 북한이 억지를 부리는데 물러서기만 하는 힐이 미더워 보일 리 없다. 부시 행정부가 ‘나 떠난 뒤에 홍수가 나든 말든 알 바 아니다’는 생각으로 북핵을 다루다가 심각한 후유증이 초래된다면 그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의미 있는 유산이라야 후대에 물려줄 가치가 있다. 부시 행정부는 양보 대신 ‘북핵 불용(不容) 원칙’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 그것이 6자회담 파트너에 대한 도리이다. 힐이 북핵에 적당히 분칠을 해 부시 행정부의 대미를 장식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당장 포기해야 할 것이다.
방형남 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