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9월 10일 밤 독일 브레멘의 기민당 전당대회장 앞으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극심한 갈등 속에 있던 헬무트 콜 총리와 하이너 가이슬러 사무총장 간에 벌어질 흥미진진한 논쟁을 지켜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전혀 엉뚱한 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밤 자정부터 헝가리에 있는 동독 난민들은 본인이 원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습니다.” 콜 총리는 의기양양하게 발표했다. 기자들은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비슷한 시간 헝가리에서 줄러 호른 외교장관이 “헝가리가 더는 난민캠프가 될 수 없다”며 8000명에 가까운 동독인의 서독행을 허용할 것이라고 선언하자 상황은 분명해졌다.
당시 서독으로 가기 위해 국경 넘어 헝가리에 몰려간 동독인 난민들의 처리 문제는 탈냉전 기류에 휩싸여 있던 유럽의 최대 현안이었다. 동독인들은 헝가리 도착과 함께 수용소로 보내졌지만 헝가리 정부로서도 수천 명으로 불어난 난민들을 마냥 붙잡아둘 수만은 없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기민당 내 쿠데타 위기까지 직면해 있던 콜 총리가 향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준비해 온 회심의 승부수였다. 당면한 민족문제의 해결 소식에 기민당 내분이 무슨 뉴스거리가 되겠는가.
그는 이미 8월 말 헝가리의 미클로시 네메트 총리와 호른 외교장관을 초청해 비밀회담을 벌였다. 민주화 바람이 불던 헝가리로서는 동독 난민 문제로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서독의 경제적 지원도 필요했지만 바르샤바조약기구 동맹국인 동독을 저버리기도 어려웠다.
결국 헝가리로부터 동독 난민의 서독행 허용 약속을 받아낸 콜 총리는 여러 차례 어떤 대가를 바라는지 물었다. 하지만 네메트 총리는 “우리는 사람을 팔지 않는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콜 총리는 “당신의 이 결정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라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회담 후 콜 총리는 5억 마르크의 대헝가리 차관을 승인했다. 다만 이 차관은 헝가리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야 제공됐다. 콜 총리에게 정치는 철저하게 주고받는 것이었다.(귀도 크놉의 ‘통일을 이룬 독일 총리들’)
어쨌든 이렇게 물꼬가 트인 동독인의 탈출 행렬은 헝가리뿐만 아니라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로, 급기야 11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 탈냉전이라는 흐름 속에 철저한 손익계산으로 과감한 결단을 해낸 콜 총리의 실용주의 리더십이 엮어낸 작품이자 행운이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