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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운전대’ 명절때마다 자식들 냉가슴

입력 | 2008-09-12 16:07:00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고령 운전자의 자가운전에 대해서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면서 고령 운전자의 자가운전에 대해서도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충남 공주가 고향인 회사원 이모(42)씨는 해마다 명절 때면 부모님이 서울에 올라오는 역귀성을 해왔다. 서울과 그다지 멀지 않아 교통 혼잡을 피한 역귀성이 차라리 낫다는 부모님의 제안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씨는 하필이면 연휴가 짧은 이번 추석,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귀향길에 올랐다. 이유는 딱 하나, 올해 74세인 아버지의 장거리 운전을 막기 위해서다.

"해마다 아버지가 차를 몰고 올라오셨는데 점점 연세가 들어가시는 걸 보니 이젠 안 되겠더라고요. 운전을 그만 하시라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고, 아버지가 운전하실 기회를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 수밖에 없어요."

최근 이씨와 아버지 사이의 가장 큰 '이슈'는 아버지의 운전 문제다.

그는 올해 5월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하러 가면서 아버지의 운전을 관찰했던 경험을 들려주었다.

"마침 운전석에 앉아 계시던 아버지가 계속 운전하시겠다고 하고, 식당이 멀지 않아서 그냥 조수석에 앉았죠. 그랬다가 까무러칠 뻔 했어요."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보행자가 건너가는 중이었는데 그를 보지 못한 듯 아버지는 그냥 차를 진행시켜 하마터면 보행자를 칠 뻔 했다. 차 보닛을 주먹으로 치며 항의하는 보행자에게 이 씨는 대신 사과하느라 진땀을 흘렸다.

그 뿐 아니다. 정지 신호인데 차를 멈추지 않아 이씨가 "아버지!"하고 소리를 지르면 "어, 빨간 불이었냐?"하고 묻지를 않나, 길을 잘못 들었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그냥 브레이크를 밟고 차를 세워 버렸다.

이 씨는 아버지가 운전을 그만 두실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최근 들어 눈이 침침하고 작은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자주 말씀하셨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문제는 운전을 그만 하시라는 그의 조언을 아버지가 들은 척도 하지 않는다는 것.

"아버지는 운전병 출신이라서 아직도 '네 운전보다는 내가 낫지'하고 생각하세요. 운전을 그만둬야 한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자존심의 문제로 예민하게 반응하셔서 대화가 더 진척이 안돼요. '네가 애비를 무시하니까 내가 긴장이 되어 실수하는 것'이라고 심하게 역정을 내신 적도 있다니까요. 그렇다고 강제로 차 키를 빼앗을 수도 없고…."

할 수 없이 이 씨 가족이 생각해낸 궁여지책은 아버지가 운전을 할 때마다 늘 어머니가 옆에 앉아 미리 "빨간 불이예요" "사람 지나가요"하고 일일이 '예보'하는 방식이다.

이 같은 풍경은 이 씨 가족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고령 운전자의 자가운전이 예전엔 흔한 풍경이 아니었지만, 이젠 사정이 달라졌다.

현재의 만 65세 이상 운전자들은 1974년 국산모델 승용차가 등장하면서 '마이 카' 붐이 일었던 1970년대 후반부터 자가용 문화에 익숙해져 지금도 계속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그 이전의 어떤 노년 세대보다 많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만 65세 이상 운전면허 소지자는 85만 명. 고령 운전자 면허소지자가 20만 명도 안 되었던 10년 전보다 400% 이상 늘었다.

공단 측은 고령 운전자 면허소지자 중 실제 운전을 하는 사람은 60% 안팎인 40만~50만 명일 것이라고 추정한다.

'직접 자가용을 모는' 라이프스타일이 반평생가량 당연한 일상이었기 때문에 현재의 노인들에게 운전을 그만두는 것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자율성을 일시에 잃는 듯한 정체성의 일대 변화다. 이 때문에 운전을 그만두기로 결심하는 것, 자녀들이 부모에게 운전을 그만 하시라고 설득하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노인돌봄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미국 사이트 케어링닷컴(www.caring.com)이 조사한 결과 '부모에게 운전을 그만둬야 한다고 말하는 게 힘들다'고 응답한 사람이 36%로 '장례식 계획을 말하는 게 힘들다'(29%)는 사람보다 많았다.

그러나 연령과 신체 상태에 따라 언젠가 운전을 그만두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만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는 그 전년도 보다 16.7% 증가했다. 고령 운전자의 교통사고 치사율은 6.8%로 전체 사고 평균 3%에 비해 2배 이상 높다.

65세 이상 운전자들은 25세 이하 운전자들보다 차량 진행 방향을 결정하는 데 5초 이상 시간이 더 걸린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시력이나 반응력 등 신체적 기능 저하 뿐 아니라 과도한 조심성에서 오는 판단 지연도 교통사고의 간접적 위험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이에 대한 교육 지침이나 안전관리 대책이 전무한 실정이다.

일본의 경우 70세 이상 운전자는 반드시 '고령자 강습'을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고령 운전자의 승용차에 '실버마크'를 부착하는 방안, 고령 운전자의 면허 갱신 때 시력 판단력 치매 등 인지기능 검사를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일본의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사고 위험이 높은 75세 이상 고령운전자들의 면허증 자진반납 운동을 펼치기도 한다. 면허증을 자진 반납하는 대신 운전경력 증명서를 발급해줘서 이를 제시하면 지하철, 버스를 무료로 승차하거나 택시요금을 할인해주는 제도다.

미국에서도 안전교육에 주력해 고령 운전자들이 질병과 약물 복용 사항을 스스로 꼼꼼히 관리하도록 돕고 있다.

도로교통공단 이원영 수석연구원은 "국내에서도 고령 운전자와 고령 운전자 교통사고가 늘고 있는 추세인 만큼 2~3년 이내에 고령 운전자의 교통안전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