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녹음 맞춰 포즈만… “연주도 연기죠”
《클래식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이야기를 담은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수 목 오후 9시 55분). 화려하진 않아도 그럴듯한 연주 장면을 보다 보면 궁금한 게 있다. 과연, 저 배우의 연주는 진짜일까.》
‘삑사리’ 부분까지 사전에 미리 대본대로 녹화
“실수로 소리날라” 오보에 스프링 끊어놓기도
○ 사전 녹음… 실제 연주는 ‘립싱크’로
10일 오후 10시 40분, 경기 안성시 구포동 성당 안은 어수선했다. 촬영 시작 40분이 지났는데 아직 한 컷도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서 나는 악기 소리가 사전에 녹음된 ‘립싱크용’과 일치하지 않았던 것. 입술이 타들어가는 이재규 PD를 보다 못해 서희태 예술감독이 나섰다. “잠깐만요, 활 좀 바꿀게요.”
바이올린 활을 송진가루를 묻히지 않은 것으로 교체했다.(송진가루를 묻히지 않으면 소리가 나지 않는다.) 잠시 후, 성당 구석에 마련된 오디오 스피커에서 장윤정의 ‘이따, 이따요’ 바이올린 버전이 흘러나왔다. 거기에 맞춰 연주하는 배우들의 바이올린에선 ‘다행히’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케이∼. 컷.”(이재규 PD)
서 감독에 따르면 드라마에 들어가는 클래식 음악은 촬영 전 스튜디오에서 연주, 녹음, 믹싱, 편집까지 이뤄진다. “대본을 보고 필요하겠다 싶은 곡들을 먼저 구상해요. 전체 오케스트라 연주부터 대본상 연주하다 ‘삑사리’ 내는 부분, 도중 어색하게 끊기는 부분까지 미리 만들어 놓죠.”
촬영장에서 배우들은 사전 녹음된 음원에 맞춰 연주 포즈를 잡을 뿐이다. 이순재의 오보에는 소리가 안 나게 아예 스프링을 끊어 놨다.
성당을 가득 메운 30여 명의 단원 중에는 낯선 얼굴이 많았다. 이들은 ‘베토벤 바이러스 프로젝트’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단원으로 대부분 연주 경력 10년이 넘는다. 일찌감치 도착한 단원들은 생전 처음 연기하랴, 배우들에게 연주지도 하랴, 눈코 뜰 새가 없다.
촬영이 없는 틈을 타 드라마 속에 삽입될 음원을 녹음해 두는 것도 이들 몫. 비올리스트 이민정 씨는 “연주를 잘하는 것보다 대본에 쓰여 있는 대로 어설픈 연주 소리를 내는 게 더 힘들더라”며 “이제는 연주도 연기하는 기분으로 하니 재미있다”고 말했다.
○ “지휘자 김명민, 가장 그럴듯해”
그렇다면 가장 ‘그럴듯하게’ 연주 연기를 하는 배우는 누구일까. 지휘자로도 활동하는 서 감독이 꼽은 최고 연주 연기자는 지휘자 강마에 역의 김명민이다. 5개월 동안 서 감독에게 지휘자의 말투, 헤어스타일, 지휘 포즈 등을 과외 받은 그는 서 감독과 오른손을 서로 묶어 지휘자의 팔 동작을 익혔다.
하지만 그의 지휘 연기를 무대에 오르기까지 평균 20년 이상 연마하는 진짜 지휘자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다. 지휘자의 악보를 읽지 못하는 그는 녹음된 전곡의 음원을 다 외웠다고 한다.
첼로를 켜는 송옥숙도 뛰어난 연주 연기를 보인다. 음악이 아닌 왼손가락으로 선을 떠는 비브라토와 오른손으로 활을 긋는 모양새만 보면 “마치 음악을 듣는 것 같은 감동을 준다”는 것이다. 아직 소리를 내지 못해 손가락 짚는 법을 스케치북에 그려 외워 놓은 트럼피터 박철민도 “트럼펫을 불기에 좋은 입을 가졌다”는 평가를 듣는다.
바이올린을 맡은 이지아는 실제 연주 실력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배우. 틈틈이 연습한 끝에 드라마에 삽입된 곡을 제법 연주할 수 있게 되자 제작진은 초반 고려했던 손가락 대역을 쓰지 않기로 했다.
서 감독은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살리려고 하지만 제작 여건상 실제 연주는 꿈같은 일”이라며 “연기의 목표는 연주를 잘하는 게 아니라 진짜 연주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진짜 같은 연주에 집중하면 연기가 안 살고, 연기에 집중하면 연주에 소홀해지는 것이 이 드라마가 가진 딜레마이기도 하다.
이날 촬영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촬영이 끝날 무렵, 카메라 감독에게서 낮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어휴, 음악 장면 한번 찍으려면 모두가 다 죽는다, 죽어.”
염희진 기자 salthj@donga.com
▲ 영상취재 :동아일보 문화부 염희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