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여성, 제국을 거쳐 조선으로 회유하다/박선미 지음/창비
《“우리 아버지가 선견지명이 있어서, 또 교육도 받은 분이라 ‘앞으로 여자도 절대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자격을 따야 된다’고 하셨어. 일본 가서 다른 건 그만두고 의학이나 약학을 하라고. (…) 고등학교 교육을 받으면서 앞으로 여자들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고요. 그래서 사회에 나가서 활동을 하는 것도. 우리 어머니 보니깐 평생 부엌에서 사시는 거야. 그저 앞치마 두르고 부엌에서.”(유학생 D 씨의 구술, 데이코쿠(帝國)여자의학약학전문학교 약학과, 1936∼40)》
그녀들, 왜 일본에 갔을까
일제강점기 조선의 청년들에게 도쿄(東京)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 도시였다. 한편으로 저항의 대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동경(憧憬)의 도시였다. 일제 식민지배로 ‘내지(內地)’가 된 일본제국은 ‘외지(外地)’ 조선 청년에게 문화와 권력이 총집결된 메트로폴리스였다. 당시 일본 유학은 낙후된 주변부에서 앞선 중심부로 가는 행위로 인식됐다. 특히 여성에게 일본 유학은 신분과 역할 상승의 기회로 읽혀졌다.
일본 쓰쿠바(筑波)대 전임강사인 저자는 각종 문헌과 구술자료 등을 통해 왜 당시 많은 조선 여성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고 그들이 무엇을 배웠으며 조선에 돌아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분석한다.
당시 조선 여성의 일본 유학은 일종의 사회현상이었다. 1910년 34명이었던 일본 내 조선인 여학생 수는 1942년 2942명으로 급증할 정도로 많은 여성이 현해탄을 건넜다.
저자는 1910년대 일본 유학을 결심하는 배경에는 실력양성론이 있었다고 분석한다. 서구문명을 받아들여 사회를 개화하기 위해 이미 시행착오를 거쳐 서구문명을 한 번 걸러낸 일본으로부터 서구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는 것이다. 실력양성론은 1920, 30년대가 되면서 진학이나 사회 진출 같은 좀 더 사적인 이유로 대체된다.
그렇게 일본으로 건너간 여학생들은 교사와 의사, 약사, 신문·잡지 기자, 예술가 등으로 귀국했다. 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와 화가로 활동한 나혜석의 경우처럼 많은 유학생이 여성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는 인식을 가질 것과 스스로 배우자를 선택할 것 등 당시로서는 선각자적인 의식과 교육자적인 의식을 갖게 됐다.
저자는 상당수 여학생이 일본 유학에서 가정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가정학을 배운 여학생들이 일본에서 발달한 근대적 가족관을 조선사회에 퍼뜨리는 등 근대의식이 형성되는 데 기여했다는 것이다.
‘현모양처론’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일본 유학생을 중심으로 형성된 ‘현모양처’라는 젠더규범이 “유교적·봉건적 가치관을 이어온 개념이 아니며 남성중심주의나 일본제국주의가 여성에게 강요한 성 역할 이데올로기만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현모양처는 여성을 한 집안의 며느리가 아니라 자녀의 교육자인 어머니이자 남편의 내조자인 아내, 가정의 책임자인 주부로 새롭게 정의한 것이었다는 주장이다. 저자는 이 같은 현모양처론이 일제 말기 총력전 체제하에서 ‘군국의 어머니상’과 같이 식민지 지배 체제에 이용됐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황장석 기자 suro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