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 달래며 허름한 식당서 훈련… 金 딴 선수들에 감사”
자원봉사하다 장애인 체육과 인연
훈련장 지어줄 후원자 나타났으면
금메달이 확정되자 코치는 텀블링을 했다. 허리를 삐끗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선수는 경기 전 우승 세리머니로 코치에게 텀블링을 주문했다. 코치는 휠체어에 앉아 있는 선수를 위해 “내가 대신 해주마” 하고 약속했다.
박건우(18·인천은광학교 고3)는 베이징 장애인올림픽 보치아 BC3(최중증 장애) 개인전과 혼성 2인조에서 우승했다. 2관왕 뒤에는 그림자 같은 김진한(38·인천은광학교 교사·사진) 코치가 있었다.
역도 선수 출신으로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한 김 코치가 장애인 체육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대 후반 장애인 역도 대표팀 코치로 자원봉사를 하면서부터.
“그때 이상하리만큼 만족감을 느꼈다”는 김 코치는 2000년 용인대 대학원에서 특수교육을 전공하며 특수학교인 은광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보치아를 알게 됐다. 덜컥 지도교사를 맡았지만 장비 외에는 아무런 지원이 없어 선수들의 저녁도, 교통비도 그가 해결해야 했다.
“5000원짜리 김치찌개 하나에 공기밥만 서너 개를 시킬 때도 많았어요. 아이들 더 먹으라고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면 늘 제 몫을 남겨놨더라고요. 그렇게 착한 학생들이에요.”
김 코치는 2004년 박건우의 재능을 발견한 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세웠다. 본격적인 고행의 시작이었다.
오후 3시에 수업이 끝나면 학교 식당으로 갔다. 보치아 코트 규격인 ‘12×6m’가 나올 수 있는 장소는 그곳뿐이었다. 식탁과 의자를 치우고 매일 오후 10시까지 훈련했다. 혼자 움직일 수 없는 박건우를 집에 데려다준 뒤 학교로 돌아와 식당을 원상 복구하면 밤 12시가 넘었다.
“매일 오전 1∼2시에 집에 돌아가 오전 7시에 출근했습니다. 언젠가 쉬는 날 두 딸을 안아 주려 했는데 낯선 사람 보듯 피해 마음이 아팠죠.”
동갑내기 부인 황나영(인천 문일여고 교사) 씨는 큰 불평 없이 남편을 지켜봤다. 김 코치가 교사를 시작했을 때 황 씨는 같은 학교 ‘선배 교사’였다.
“금메달을 딴 날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목표를 이뤘으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동안 많이 참았나 봐요.”
김 코치는 제대로 된 시설에서 지원을 받으며 보치아 유망주들을 키우고 싶다고 했다. 소박한 꿈이지만 실현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학교 식당은 긴급 보수가 필요한 D등급 건물이고 금메달 2개를 딴 보치아에 대한 관심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 “보치아에 미쳤다”고 했다. 하지만 가족도 뒤로한 채 박봉을 털어 가며 선수를 키워 온 그가 계속 보치아에 미쳐 있기를 바라는 건 정말 ‘미친 짓’일지 모른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