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버거. 이런 애증(愛憎)의 음식도 없다.
깨알이 붙은 두툼한 빵에 지글지글 구운 고기, 그 위로 각종 야채, 그리고 이를 끈끈하게 하나로 묶듯 아래로 흘러내리는 소스….
그것을 입 안에 넣는 순간 사람들은 “유혹에 넘어갔다”고 말한다.
우리는 왜 윤기 자르르 흐르는 이 음식 앞에서 참는 법부터 먼저 배워야 했을까.
햄버거의 최대 안티(anti·반대)세력은 바로 엄마다. 맥도날드와 버거킹 앞을 지날 때마다 행여나 아이들이 볼까봐 걸음을 재촉했고, “엄마 사줘!”를 외치며 치맛자락을 잡고 늘어지는 아이에겐 “안돼!”라는 불호령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햄버거를 입에 댔다.
푼돈을 모아 친구들과 함께 베어물던 햄버거의 고소함. 그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을 전율시켰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할 때 더 스릴을 느끼듯 햄버거는 어릴 적 우리들의 ‘선악과(善惡果)’와도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햄버거는 정크푸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기름진 음식은 몸에 좋지 않다”, “햄버거는 기름지다”, “고로 햄버거는 나쁘다”의 3단논법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Cal의 이 고열량 음식을 끊기란 쉽지 않다.
피할 수 없으면 차라리 즐기라고 했던가?
이른바 ‘엄마손’, ‘핸드메이드’ 마케팅이라 불리는 동네 수제(手製) 햄버거 집이 최근 하나 둘 생겨나며 인기를 얻고 있다.
이들은 특유의 ‘손맛’을 자랑하며 획일화된 체인점식 패스트푸드점에 싫증난 사람들을 끌고 있다.
단 한 곳뿐인 동네 명물 햄버거 가게 전성시대, 햄버거와의 애증은 또다시 시작되고야 말았다.》
● 개성 없인 햄버거도 아냐! 개성파 버거 시대
동네 햄버거 가게가 주목을 받게 된 데에는 20대 젊은 고객들의 역할이 크다. 패스트푸드점에 비해 가격은 비싸지만 ‘하나를 먹더라도 제대로 먹자’는 식의 사고가 이들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개성. 전 세계 유일무이한 햄버거를 먹는다는 것 자체로 이들에겐 즐거움이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 홍익대 근처 주차장 사거리에 있는 ‘감싸롱’(02-337-9373)은 가게 이름부터 귀를 솔깃하게 만든다. 커다란 감나무가 서 있는 가정집을 개조해 만들었다고 ‘감’과 ‘살롱(Salon)’을 붙여 가게 이름을 지었다. 아늑한 가정집 느낌이 난다. 이 가게의 민중식 사장은 “홍대와 어울리는 ‘빈티지’ 스타일을 살리기 위해 목재로 인테리어를 꾸몄다”고 말했다.
개성은 맛으로 이어진다. 이곳의 햄버거는 모두 안주인의 손끝에서 나온 맛이다. 대표 메뉴인 ‘애니멀 버거’(9100원)는 채 썬 양파를 매콤한 칠리소스와 버무려 만든 것으로 사각사각 씹히는 맛이 귀를 자극한다. 다만 양파가 너무 많아서 먹기에 부담스럽고 먹을 때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는 것이 흠인데, 이런 모습을 “동물 같다”며 애니멀 버거라 명명했다. 단점을 일부러 부각하며 개성으로 승화시킨 것이다.
‘버섯 버거’(8800원)는 참살이를 즐기는 채식주의자들을 겨냥한 메뉴다. 새송이버섯에 파르마산 치즈가 뒤섞여 있어 겉보기엔 지저분하지만 한 입 베어 물면 특유의 올리브향이 산뜻한 느낌을 준다.
감싸롱이 홍대 앞 ‘자유로운 영혼’들의 아이콘이라면 경기 송탄 미군부대 앞의 ‘미스 리 햄버거’(031-667-7171)는 오산 공군기지 내 군인들의 로망이나 다름없다. 2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송탄의 명물로 자리매김한 이 햄버거는 패티와 함께 계란 프라이를 넣는 것이 특징이다. ‘오버 이지(Over easy)’로 요리한 계란 프라이와 함께 양배추를 가득 집어넣고 케첩과 마요네즈를 아낌없이 뿌리는 게 이 햄버거의 특징이다.
단돈 2000원에 계란과 고기의 오묘한 조화, 여기에 사각사각 씹히는 양배추, 포장지 한 가득 흐를 정도로 넘치는 소스…. 이 모든 것을 맛볼 수 있기에 전역한 예비역들도 오로지 햄버거를 먹기 위해 송탄행 고속버스를 타고 이곳에 들른다. 이 때문인지 송탄 지역에는 ‘한스버거’, ‘미스 진 버거’ 등 10여 개의 아류작이 원조의 맛을 흉내내고 있다.
▲ 영상취재 : 베이징=신세기 동아닷컴 기자
● 햄버거의 시작은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색다른 햄버거. 그 연구의 시작은 햄버거의 정통 맛 연구에서부터 시작된다. 미국인들이 반할 만큼 얼마나 본고장의 맛을 재현하는지에 승부가 달린 것이 아닐까. 그래서 유독 ‘정통’, ‘아메리칸 스타일’ 등의 수식어를 내건 동네 햄버거 가게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의 ‘플래터스’(02-744-7651)는 미국인들을 겨냥한 동네 햄버거 집으로 유명하다. 플래터스의 이정우 사장은 미국 필라델피아 유학 시절 동네에서 먹었던 ‘필리 치즈 샌드위치’를 잊지 못해 다니던 무역회사를 관두고 필라델피아와 텍사스 휴스턴의 동네 햄버거 가게에서 비법을 배워와 2005년 11월에 가게를 열었다.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실내 인테리어도 1950년대 복고풍을 메인 테마로 잡았고 가게 이름 역시 1950년대 흑인 밴드 ‘플래터스’에서 따왔다.
깊고 풍부한 맛을 내기 위해 ‘잭 대니얼’ 위스키로 소스를 만드는 것이 특징. 이렇게 만든 것이 ‘스모크 하우스 버거’(8500원)와 양송이를 스위스 치즈에 녹인 ‘머시룸 스위스 버거’(8500원)인데, 모두 한 입 베었을 때 고기 육즙이 흘러내리는 것이 특징이다. 이 사장은 “고기를 센 불에 아주 살짝 구워야 육즙이 나온다”며 노하우를 귀띔해줬다.
미국식 햄버거를 논할 때 서울 용산구 이태원을 빼놓을 수 없다. 이 동네의 ‘내쉬빌’(02-798-1592)은 26년간 동네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원조 수제 햄버거로 유명하다. 1982년 해군 장교인 미국인 남편과 함께 가게를 세운 이옥희 사장은 “이태원의 명소로 자리잡기 위해 2001년까지 아예 한국인 손님을 받지 않았다”며 미국식 정통성을 강조했다. 사실 이곳의 햄버거(8000원)는 빵과 고기, 상추, 토마토, 양파 등 5가지 재료뿐이어서 지극히 단순하다. 맛도 다른 가게에 비해 짜고 밋밋한데 이 사장은 “최대한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춘 결과”라고 말했다. 맛 비법은 화산석 위에서 고기 굽기. 이는 담백한 맛을 내기 위한 것으로 이 사장이 직접 미국 오리건까지 날아가 화산석을 구해온단다.
1980년대 미국의 허름한 선술집(펍) 분위기를 연출한 ‘스모키 살룬’(02-795-9019) 역시 이태원의 명물 중 하나. 칠리와 타바스코 소스가 화산처럼 넘친다며 이름 붙여진 ‘볼케이노’ 버거와 파인애플, 양상추, 베이컨 등을 15cm 높이로 쌓은 ‘빅 아일랜드’ 등이 인기 메뉴. 인기에 힘입어 최근 삼성동, 순화동 등에 매장을 늘렸다.
● 누가 햄버거를 패스트푸드라 했던가? 요리로 재탄생
“왜 햄버거는 요리가 될 수 없지?”, “햄버거를 고급화해 보면 어떨까?”, “칼로 썰어먹는 햄버거는 어때?”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쿡앤하임’(02-733-1109)은 이런 고민 끝에 탄생한 수제 햄버거 집이다. 삼청동 미술관 큐레이터 출신인 이려은 사장은 호텔 접시에 받쳐 칼로 썰어 먹는다는 콘셉트를 생각해냈고 이를 위해 이탈리아 밀라노 이프카에서 요리를 배웠다. 자연스레 미국식 햄버거가 아닌 이탈리안 햄버거를 만드는 것이 이 곳의 특징.
‘햄버거 요리’로의 전환을 가능케 한 이 가게의 대표 메뉴는 바로 ‘아트버거’(1만6000원)다. ‘햄버거도 예술작품처럼 우아할 수 있다’는 표어를 함축한 이 메뉴 속에는 총 3가지 카테고리가 담겼다. 마요네즈와 비트(빨간무)즙을 섞어 만든 소스가 마치 딸기맛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리는 ‘바비큐 버거’, 고르곤 졸라, 버팔로, 마스카포네 등 4가지 치즈로 만든 ‘포르마지오 버거’. 그리고 와인으로 비트를 절여 만든 새콤한 ‘엘레강스 버거’ 등. 특히 네모난 포카차 빵은 매일 아침 만드는데 ‘요리’라는 점을 내세우기 위해 윗부분에는 빵을 덮지 않는다.
햄버거가 요리로 거듭나기 위해선 분위기도 한 몫 거들어야 한다. 한옥을 개조해 만든 음식점 외부와 갤러리로 꾸며놓은 내부는 동서양을 왔다갔다하는 느낌을 주어 신비롭다. 특히 삼청동이라는 동네 특성을 살려 매달 신진 작가들이 이곳에서 전시회를 열고 있다니 동네 햄버거, 이만하면 ‘개천에서 용 난’ 것 아닐까.
글=김범석 기자 bsism@donga.com
사진=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카페테리아… 낙서… 특화마케팅이 인기비결▼
동네에 하나뿐인 햄버거 가게. 맛을 보기 전 귀가 솔깃한 건 왜일까.
음식 전문가들은 수제 햄버거라는 점, 특색 있는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다는 점, ‘나만의 무엇’을 갖길 원하는 젊은 고객의 심리를 반영한 점 등을 원인으로 분석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인기 비결은 ‘동네 특화 마케팅’에 있다. 인테리어부터 메뉴, 홍보 등 대형 체인점에서는 볼 수 없는 마케팅 덕분에 이들 가게에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때문에 패스트푸드 업체도 ‘동네 마케팅’에 관심을 갖는 경향이다. ‘롯데리아’는 지난해 문을 연 시청점의 인테리어를 커피전문점이 밀집해 있는 동네 특색에 맞게 카페테리아 스타일로 연출했다. 또 홍대점은 예술적 분위기를 내기 위해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 나난 씨를 영입해 ‘낙서 인테리어’를 만들었다.
맥도날드도 마찬가지. 수도권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이 많은 경기 포천점과 수원의 수원성점은 차 안에서 메뉴를 주문할 수 있게 만든 ‘맥드라이브’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푸드 칼럼리스트 최신애 씨는 “단순히 패스트푸드가 아닌 ‘핸드메이드’, ‘나만의 햄버거’가 하나의 마케팅으로 자리 잡는 추세”라며 “차별화된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것이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