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상 산업기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허영섭 녹십자 회장은 “산업기술이 발전해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산업기술이 발전하려면 기업의 연구개발이 더욱 활발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제공 녹십자
《“대내외적인 여건이 어렵지만 산업기술 발전을 위해 기업들이 연구개발(R&D)에 더욱 매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제22회 ‘인촌상(산업기술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허영섭(67) 녹십자 회장은 평생 국민 질병 치료와 산업기술 발전을 위해 일해 왔다.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독일 명문 아헨공대에서 박사 과정을 밟던 중 1970년 귀국해 녹십자에 입사한 지 올해로 38년째다. 경기 용인시 녹십자 본사 집무실에서 만난 허 회장은 최근 건강이 좋지 않지만 1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 동안 자세를 흩뜨리지 않았다. 허 회장은 “한국은 뛰어난 인재가 많기 때문에 밝은 미래를 확신한다”며 “우리 산업기술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격려하는 데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제약회사 대표로는 드물게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과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그동안 제약업계의 틀을 벗어나 한국 산업기술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해 왔다.》
―올해 산업기술 부문 인촌상 수상자로 선정되신 소감은 어떠신지요.
“국가경제 발전의 추동력인 산업기술계를 대표해 인촌 선생의 높은 뜻을 기리는 인촌상을 받게 돼 대단히 영광스럽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많은 상을 받았지만, 이번처럼 많은 축하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인촌상은 전통과 권위에서 다른 상과 격이 다를 뿐만 아니라, 품위가 있다는 것이 지인들의 한결같은 말씀이었습니다. 한국 산업 발전을 위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결코 굴하지 말고 가일층 분발하여 위기를 극복해 나가라는 따뜻한 격려의 뜻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허 회장은 그동안 여러 차례 산업훈장을 받았고, 1992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기도 했다. 2002년에는 한국 최고경영자(CEO) 대상을 받았으며, 2005년에는 독일 정부로부터 십자공로훈장도 받았다.
―기업의 R&D 중요성을 자주 강조해 오셨는데요.
“제가 회장을 맡고 있는 산업기술진흥협회에서 ‘장영실상’을 수여하는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조그만 기업에서 세계 최초, 세계 최고 기술을 개발해 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랍니다. 그게 바로 대한민국의 힘입니다. 전에 동아일보가 ‘세계 최강 미니기업’ 장기 시리즈를 연재해 호응을 얻은 것처럼 ‘큰 언론’이 이런 노력을 이끌어주고 격려해 줘야 합니다. 산업기술이 발전해야 나라가 부강해지고, 산업기술이 발전하려면 R&D가 활성화돼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허 회장이 2003년 이후 5년 넘게 이끌고 있는 산업기술진흥협회는 연구소를 운영하는 국내 1700여 개 기업 중 700여 개 기업이 소속돼 있다. 이 협회는 우수한 기술을 개발한 연구자에게 ‘장영실상’을 수여해 격려하고 있다.
―녹십자는 백신 개발로 국민 질병 치료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백신에 중점을 두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류의 역사는 질병과의 투쟁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질병을 치료하려면 경제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은 손실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질병을 앓기 전에 이를 예방하는 백신을 접종하면 해당 질병에 대한 위험성을 감소시켜 주기 때문에 비용 대비 치료효과가 매우 높습니다. 안타깝게도 개발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생산, 보관, 운반 등이 까다로워 대부분 제약사들은 백신사업을 꺼리는 형편입니다.”
녹십자는 1983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B형 간염 백신(헤파박스-B) 개발에 성공했다. 당시 13%에 이르던 국내 B형 간염 보균율은 2∼3%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어 1988년에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유행성출혈열 백신(한타박스)을 개발했고, 1993년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수두백신(수두박스)을 개발하는 등 백신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허 회장은 12년에 걸쳐 이뤄진 B형 간염 백신 개발을 일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200여 개 기업이 있지만 국내 제약업계는 여전히 영세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국내 제약시장은 연간 10조 원 규모로 이는 대형 다국적 제약사의 1년 R&D 비용에도 미치지 못합니다. 물론 출발 조건이 달랐기 때문에 단순 비교를 할 수는 없겠지요. 아직 우리 제약회사 규모가 혁신적인 신약 개발에 뛰어들기엔 부족한 형편입니다. 제약사 간 인수합병(M&A)을 활성화해 덩치를 키워야 합니다. 다행스러운 점은 제약산업의 중심이 화학 의약품에서 바이오 의약품으로 옮아가고 있는 추세여서 이 분야에 우수한 기술을 갖고 있는 국내 제약사들의 장기적인 미래는 밝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제약산업이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시는지요.
“수출 비중을 늘리고 신약 개발을 통한 해외 시장 진출이 결국 한국 제약산업이 가야 할 방향이라고 봅니다. 제약산업이 그동안 국내에서 비슷한 제품으로 영업 경쟁을 해 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신약 개발이라는 발전적인 경쟁에 주력해야 합니다. 또 현재 정부가 복제약 가격 인하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약가 인하가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가격을 낮추면 그만큼 국내 제약기업의 경쟁력은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제약산업은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고 거의 전멸한 상황입니다. 국내 제약산업도 대만처럼 다국적 제약기업에 종속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최근 몇 년 동안 국민들 사이에 만연한 반(反)기업 정서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기업의 최고 덕목은 이윤 추구지만 사리사욕만을 채우려는 기업인은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잘하는 기업을 격려해 파이를 키워야지 손가락질만 해선 안 됩니다. 요즘 신입사원들을 보면 누가 그렇게 편향되게 가르쳤는지…. 우리 사회에 팽배한 반기업 정서가 하루속히 사라지고 기업인들이 존경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조용우 기자 woogija@donga.com
○ 허영섭 회장
△1941년 경기 개풍 출생
△경기고, 서울대 공대, 독일 아헨공대 졸업
△1970년 녹십자 입사
△1984년∼ 목암생명공학연구소 이사장
△1987∼1994년 한국유전공학연구조합 이사장
△1992년∼ 녹십자 대표이사 회장
△1994∼1997년 한국생물산업협회 이사장
△1997∼1999년 한국제약협회장
△2000년∼ 한독협회장
△2001년∼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
△2003년∼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 회장
△2005년∼ 국제백신연구소 한국후원회 이사장
△2007년∼ 한독상공회의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