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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주영의 그림 읽기]악질친구야, 천당에 있다고?

입력 | 2008-09-20 02:59:00

‘최승호 시인의 말놀이 동시집 3’ 그림=윤정주, 비룡소


15년 전 저승으로 떠난 초등학교 동창에게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교통사고로 숨진 사람의 전화라 끔찍했습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지옥나라의 걸쭉한 똥통 속에서 잠수와 부상을 거듭해야 할 그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밝고 여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고를 당했을 때 그의 시신은 갈가리 찢겨 참혹하기 그지없었으나 진정으로 슬퍼하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주검조차 냉소적인 푸대접을 받게 된 것은 그가 살아생전 못된 짓만 가려서 하는 악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길 가는 노인 잡아채서 입 안에 있는 틀니 빼내어 밟아 버리기. 촛불집회 한가운데로 휘발유 드럼통 굴려가서 불 댕기기, 초상집 영정 앞에서 큰 소리로 중국집과 휴대전화 통화하기, 길가는 아낙네 붙잡아 입 안에 담배연기 뿜어 넣기, 조폐공사에 침입하여 인쇄기에 모래 뿌리고 잠적하기, 재판정 방청석에서 코를 달달 골며 낮잠 자기, 장례식장에서 부조금 가로채기, 한밤중 남의 집 안방에 침입하여 홀딱 벗고 잠자기. 이런 악행을 예사로 저지르고 다니던 당사자였습니다.

정녕 반갑지 않은 전화였습니다만 그의 밝고 거드름 피우는 목소리에 당혹한 나머지 지금 어디서 전화를 하느냐고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바로 천당에서 거는 전화라고 했습니다. 나는 네가 어째서 감히 천당으로 가게 됐느냐고 다급하게 되물었습니다. 그는 죽고 난 뒤 1년 동안 혹독한 지옥 생활을 치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웃한 천당나라에서는 한 가지 심각한 사회 변고가 발생하여 해결 방안을 놓고 고심 중에 있었다고 합니다. 천당이란 선량하고 도량이 넓고 자비만 베풀며 살아왔던 사람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그곳에서는 악질이란 것이 도대체 어떤 사람을 지칭하는지, 범죄가 무엇을 일컫는지 본보기가 없음으로써 심각한 교육적 사회적 병증이 생겨 버렸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지옥나라에서 가장 악질적이라는 인사를 천당나라의 반면교사로 발탁하는 일이 벌어져 벌써 14년째 천당에서 생활하게 됐답니다.

그는 덧붙였습니다. 너는 지금까지 아무런 죄 지은 일 없이 고매하고 품위 있는 생활을 유지해왔으므로 조만간 천당에서 너를 만나게 될 것이로구나. 나는 자신 있는 대답을 못하고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어정쩡하게 대답했습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연민에 그득 찬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렇다면 너는 나처럼 반면교사 될 자격도 없는 놈인가 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