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 각국은 인도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현지 인도인을 용병으로 고용했다. 이들은 페르시아어로 병사를 뜻하는 ‘시파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세포이로 불렸다. 특히 영국은 네덜란드 프랑스와 각축전을 벌이면서 세포이들을 후하게 대우했다.
그런 탓에 세포이 중에는 하층 카스트는 물론 브라만 카스트도 많았다. 그러나 상층 카스트가 많아지면서 종교적 금기와 세포이 복무규정이 충돌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일부는 인도 땅을 벗어나면 카스트를 상실한다는 이유로 해외 출정을 거부하다 축출되기도 했다.
이처럼 세포이들의 불만이 고조되던 1857년 초 영국은 신형 엔필드 소총을 지급했다. 그런데 이 소총의 탄약통이 문제가 됐다. 총알을 장전하기 전에 탄약통의 끝을 입으로 비틀어 열어야 했는데 새 탄약통에 쇠기름과 돼지기름이 발라져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세포이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금기인 쇠기름과 돼지기름을 발라 자신들을 모욕하려는 술책이라고 여겼다. 곳곳에서 새로운 탄약통 수령을 거부하면서 항명죄로 투옥됐다.
급기야 그해 5월 델리 근처의 미루트에서 세포이 3개 연대가 폭동을 일으켜 감옥에 갇힌 항명자들을 석방시키고 유럽인을 살해했다. 옛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델리를 점령한 세포이들은 황제를 옹립해 무굴제국의 부활을 도모했다.
영국은 충성스럽다고 여겼던 세포이들의 반란 소식에 경악했다. 더욱이 많은 영국 여성이 세포이들에게 성폭행당하고 한 영국군 대위의 아내가 산 채로 요리용 버터기름에 넣어졌다는 터무니없는 소문이 돌면서 영국 전역은 복수의 열기로 들끓었다.
9월 20일 델리를 탈환한 영국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의 잔치를 벌였다. 영국군 행군로에 늘어선 나뭇가지마다 목이 매달려 걸린 세포이 시신이 즐비했다. 한 거대한 벵골보리수는 150구에 이르는 시신으로 뒤덮였다(닐 퍼거슨의 ‘제국’).
포로가 된 힌두교도와 무슬림 세포이에게는 소 피와 돼지 피를 강제로 먹여 보복했다. 델리도 철저히 파괴됐다. 시인 미르자 갈리브는 이렇게 읊었다. “델리는 지금 어디에 있나요? 그래요, 한때 인도라는 나라에 그런 이름을 가진 도시가 있었더랬지요.”(이옥순의 ‘인도현대사’)
영국에선 ‘세포이의 반란’으로, 인도에선 ‘최초의 독립운동’으로 불리는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영국은 종교문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정책을 표방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론 힌두교도와 무슬림을 자극해 증오를 부추기는 분리지배(divide and rule) 정책으로 식민지를 유지했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