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남 씨(오른쪽)와 소설가 신경숙 씨가 나무 조각 작품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다. 윤 씨는 5년 동안 버림받은 개를 모티브로 삼아 1025개의 나무 조각을 만드는 작업에 매달려 왔다. 고미석 기자
《얼핏 보기엔 창고인가 싶었다.
경기 화성시 봉담읍 수기리의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한 조립식 건물. 한국 미술계의 대표적 여성 작가로 꼽히는 윤석남(69) 씨의 작업실이다. 19일 이곳의 문을 열고 들어서던 소설가 신경숙(45) 씨는 ‘아!’ 탄성을 질렀다.
마치 사열을 받는 듯, 크고 작은 개들이 줄지어 도열해 있다. 나무로 깎은 1025마리의 개는 30cm에서 1m가 넘는 것까지 크기와 생김새, 표정도 제각각이다. 윤 씨가 5년간 꼬박 매달려 작업해 온 나무 조각은 이제 외출을 앞두고 있다. 27일∼11월 9일 서울 대학로 아르코 미술관(02-760-4724)에서 열리는 ‘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전.》
“2003년 일민미술관에서 ‘늘어나다’전을 할 때 버려진 개들을 돌보는 할머니의 기사를 읽게 됐습니다. 할머니를 찾아가 1025마리의 개를 만났던 그때, 무조건 이 작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죠.”(윤) “그 덕분에 구원받은 개들이네요. 버려진 생명을 다 살려내신 거잖아요.”(신)
작품마다 이야기를 담아내는 화가와, 색채와 이미지가 아른거리는 회화적인 글을 쓰는 작가의 만남. 일민미술관 전시를 통해 첫 인사를 나눈 뒤 5년 만이었다. 버려진 개를 통해 힘없는 존재의 눈물을 닦아 준 작업이 두 마음을 하나로 이어 주었다.
신=선생님 작업은 굉장히 문학적이에요.
윤=뒤늦게 미술에 뛰어들었을 때는 모더니즘과 추상이 휩쓸던 시기였죠. 어머니를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했을 때도 화단에선 문학적인 것은 미술이 아니라고 내쳤지만 상관없었죠. 난 이야기를 하고 싶었으니까.
‘여성으로서 산다는 것’에 집중해 온 윤 씨의 작업은 미술과 담쌓은 사람의 가슴에도 절절하게 다가온다. 진정성의 힘이다. 한때 길들여졌다가 유기된 개들의 소리 없는 통곡을 연민의 눈으로 응시한 이번 신작도 마찬가지다. 개를 조각하면서 아픔을 나눈 작가의 마음이 오롯이 녹아 있어 찡한 울림을 남긴다. “자연색의 조각은 아직 생기 있는 애들이고, 무채색 개들은 많이 아픈 애들, 수묵화 느낌의 조각은 살아 있는지, 죽은 것인지 모르는 수상한 아이들이죠.” 삶과 죽음의 심연을 가로지르는 각각의 존재를 인간과 동등한 생명체로 대접해 준 작가의 말이다.
신=선생님 작업을 보면 글이 쓰고 싶어져요. 가만히 생각하게 만드는 깊은 맛이 있어요.
윤=내 작품은 어렵지 않죠. 작품이 쉬우면 가볍게 느껴질까 싫어하는 작가도 많지만 난 사람들에게 친근한 게 좋아요.
신=가볍거나 쉬운 게 아니라 보편적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한 가닥을 건드리니까요.
어려운 살림에 미대는 꿈도 꾸지 못했다. 마흔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윤 씨. 화단에선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전업주부의 늦깎이 활동을 냉랭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빨래판으로 만든 어머니 조각상과 뾰족한 못이 솟아나온 의자 등을 통해 희생으로 점철된 어머니의 삶, 억눌려 살아온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했다. 지금 그는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구축한 페미니스트 작가로 우뚝 서 있다.
윤=애초엔 개를 돌본 할머니가 주인공이고, 그 보살핌에 대해 말하려 했는데 하다 보니 삶과 죽음을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마치 내가 버려진 것처럼….
인도네시아산 나무를 사들여 방부 처리를 마치는 데 두 달. 작업실로 가져와 드로잉한 뒤 나무를 잘라 페인팅할 수 있게 표면을 갈아내는 등 단계마다 손이 많이 갔다. 그래도 지루한지 몰랐다. 조각 하나하나마다 느낌이 다 달랐다.
윤=난 얘들이 말이지, 진짜 개 같아요. 작업하면서 말을 건네요. “그래, 걱정하지 마.” 눈동자에 점을 찍는 순간, “그래, 이젠 쉬어”라고 하죠. 뭐라 그럴까, 동일시되는 기분이죠.
신=저도 장편 쓸 때 주인공이 옆방에 사는 것처럼 이름을 부르기도 하는데….
윤=완성하고 보니 개들의 고통이나 슬픔은 안중에 없고 작품에 대한 욕망만 투사한 것 같아 미안했어요. 그래서 굿으로 위로해 주려고요(26일 오후 6시 전시장에서 김금화의 진오귀굿이 펼쳐진다).
나이 때문인지 세상 모든 것에 연민의 정이 생긴다는 윤 씨. 처음엔 개로 시작했으나 인간도 버려지는 존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가장 힘없고 약한 존재를 우리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다른 존재의 고통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담은 그의 작업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이유다.
화성=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