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촌상 교육 부문 수상자인 KAIST 서남표 총장은 “국가가 경쟁력을 가지려면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이 반드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사진 제공 KAIST
한국 학문간 벽 너무 높아…융합연구해야 과학 발전
일자리 늘리려면 대기업보다 연구소-벤처에 지원을
“지식경쟁 사회에서 한 나라의 경쟁력은 대학이 이끕니다. 한 나라에서는 소수의 연구중심대학들이 그 역할을 합니다. 한국에도 최소한 2, 3개의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이 꼭 탄생해야 합니다.”
22회 인촌상 교육 부문 수상자인 KAIST 서남표(72) 총장은 25일 “미국에도 많은 대학이 있지만 그중 10∼20개의 연구중심대학이 다른 대학들을 선도하면서 국가 경쟁력을 주도한다”며 이같이 말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기계공학과장과 미국과학재단(NSF) 공학담당 부총재 시절 ‘개혁전도사’였던 그는 KAIST 총장 취임 이후 한국 대학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교수 테뉴어(tenure·정년보장) 심사제도 및 재계약 강화, 인성 위주의 입시 개혁, 21세기 과학기술 연구방향 설정, 융합연구를 위한 KAIST 연구원 설립, 100% 영어 강의, 성적 부진 학생 등록금 징수 등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이날 대전 유성구 KAIST 총장실에서 만난 서 총장은 다소 낙담한 표정이었다. 세계적인 명문대학과 경쟁하기 위해 교수를 대폭 충원하려던 계획이 최근 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일하자는 제의를 여러 번 사양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총장직을 수락하게 됐는지….
“잿더미로 변한 조국을 뒤로하고 미국으로 떠날 때 언젠가는 꼭 이 나라에 돌아와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었죠. 한국에서 1970년대부터 같이 일하자는 제의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고 연구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어요. 뒤늦게 철이 들었다고나 할까요.”
서 총장은 하버드대에 한국어과를 개설한 아버지(고 서두수 박사)와 상봉하기 위해 1954년 미국으로 떠나 52년 만인 2006년 7월 KAIST 총장으로 돌아왔다. 6·25전쟁으로 북한 치하의 서울에서 매일 노역을 하며 고단한 삶을 살았던 소년 서남표는 백발의 세계적인 공학자가 돼 있었다.
―세계적인 대학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정부가 가능성 있고 개혁 의지가 강한 대학에 집중 투자하고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십 년간 미국 주립대학들 데이터를 추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미시간대가 좋은 성공사례죠.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중국은 일류대학 육성 사업인 ‘985 공정’과 첨단기술 및 중점기초연구 사업인 ‘863·973 계획’ 등을 통해 칭화대에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고 있습니다.”
―KAIST에 집중 지원하면 다른 대학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지 않나요.
“1950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한국인이 1∼3위를 차지한 뒤 동네 친구들과 매일 먼 거리를 뛰곤 했습니다. 성공 스토리의 영향이죠. 한국은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대 여러 대학을 동시에 세계 명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한국 정부의 대학 예산은 하버드대의 연간 예산보다 조금 많습니다. 균등 지원하면 세계적인 대학이 나올 수 없는 이유입니다. 미국 최대의 기초연구 지원기관인 NSF 공학담당 부총재 시절 미국 전체 대학을 대상으로 어떻게 하면 공학교육을 발전시킬지 무척 고민했습니다. 한국에서는 KAIST가 세계적인 연구중심대학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한국의 과학기술이 발전하려면….
“현대물리학의 기념비적 발견들이 1930년대 독일 베를린 반경 200마일 내에서 나왔습니다. 하이젠베르크나 맥스웰 등과 같은 물리학 대가들이 그 안에서 서로 교류하며 자극을 줬기 때문이죠. 새로운 발견을 하려면 유능한 과학자들이 융합연구를 해야 하는데 한국은 조직 간의 벽이 높아 문제입니다. 햇빛이 유리창을 통과하는 것처럼 학문에는 벽이 없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가능성이 많아요. 열심히 일하고 대학이 많으며 일반적인 교육 정도가 높기 때문이죠.”
―신성장동력기획단장을 맡고 있는데….
“이 기획단의 목적 중 하나는 국민소득을 2배로 늘리고 일자리를 많이 만드는 것입니다. 대기업은 돈 되는 일을 알아서 잘하니 정부는 불필요한 규제만 풀어주면 됩니다. 하지만 효율을 중시하는 대기업에 많은 일자리를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새로운 연구를 하려는 벤처기업이나 연구중심대학, 연구소 등에 집중 투자를 해야 일자리가 많아집니다. 대덕연구단지에서 뭔가 획기적인 연구결과가 나오고 벤처기업들이 생겨나야 하는데 마치 공원같이 조용해 안타깝습니다. 긴 눈으로 보면 해변의 100마일 안에 세계 인구의 5분의 1가량이 집중된 황해권이야말로 좋은 기회이고 시장입니다.”
―앞으로 총장 임기가 2년이 채 남지 않았습니다.
“테뉴어 심사제도를 계기로 교수들이 연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형성됐습니다. 전보다 훌륭한 학자들이 교수로 지원해 오고 있습니다. 창의성과 대인관계 등을 중시한 입시 개혁은 고교와 다른 대학의 공감을 얻고 있습니다. KAIST와 무관한 사람들이 최근 기부를 많이 하고 있어 무척 기쁩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추진해 온 개혁이 제 궤도로 정착되도록 해야죠.”
대전=지명훈 기자 mhjee@donga.com
○ 서남표 총장
△1936 경북 경주 출생
△서울사대부고(2학년 중퇴), 미국 브라운 앤드 니컬스 고교 졸업,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MIT) 기계공학과(학사 석사), 미국 카네기멜런대 기계공학 박사
△1970년 MIT 기계공학과 교수
△1984∼1988년 미국과학재단(NSF) 공학 담당 부총재
△2006년∼현재 KAIST 제13대 총장
△2007년 이스라엘 테크니온공대 및 호주 퀸즐랜드대 명예박사
△현재 국가과학기술위원, 한국공학교육 인증원장, 신성장동력기획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