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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보다 ‘박애주의자’로서 더 빛났던 폴 뉴먼

입력 | 2008-09-28 16:01:00

어린이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산골짜기 갱단 캠프'에서 어린이들과 어울리고 있는 폴 뉴먼.


"저는 지금까지 남다른 행운을 누려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더불어 일부 어린이들이 운명의 가혹한 장난으로 이런 특권을 박탈당했다는 사실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우연한 특권을 누린 우리가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이제껏 누려보지 못한 즐거운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제가 생생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처럼 말입니다."

미국의 전설적 영화배우 폴 뉴먼이 생전에 어린이 난치병 환자를 위한 캠프 '산골짜기 갱단'을 만들면서 했던 말이다.

폴 뉴먼이 26일 (현지시간) 83세의 나이로 숨진 뒤 온라인 세계에서는 '스타'보다 '박애주의자'로서의 그를 기리는 애도의 물결이 조용히 일고 있다.

그처럼 앞장 서 부의 사회 환원과 자선을 실천한 유명인도 많지 않기 때문이다. 폴 뉴먼이 스크린 밖에서 펼친 활동은 한 사람의 꿈이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청소년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는 '스코트 뉴먼 센터'를 비롯해 수익금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업인 '뉴먼즈 오운', 불치병 어린이 환자를 위한 국제 규모의 캠프 '산골짜기 갱단', 기업의 자선활동을 조직하는 단체인 '기업 자선 촉진 위원회(CECP)'를 잇따라 설립했다.

이 모든 활동이 은막의 스타로 사랑받으며 세계적 명성을 누린 '행운'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다. 되레 폴 뉴먼의 사회적 실천은 개인적 불행에서 시작되었다.

1978년 그는 외동아들 스코트를 약물 남용으로 잃고 만다. 2년 뒤인 1980년 폴 뉴먼은 청소년 약물 오남용을 예방하는 재단인 '스코트 뉴먼 센터'를 설립했다. 아들을 잃은 아픔을 사회적 사랑의 실천으로 승화한 것이다.

그해 겨울, 폴 뉴먼이 '나눔의 망'을 더 넓게 짤 수 있는 기회가 우연히 찾아왔다. 1980년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어느 날, 폴 뉴먼은 친구들에게 나눠줄 샐러드 드레싱을 만들었다.

친구들에게 나눠주고도 남자 장난삼아 근처 가게에 팔아본 드레싱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고 폴 뉴먼은 1982년 드레싱 회사 '뉴먼즈 오운'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무방부제, 천연재료 100%의 드레싱으로 첫해에만 92만 달러의 수익을 냈다.

놀라운 것은 이 같은 성공이 아니라 폴 뉴먼의 회사 운영 방식이다. 그는 첫해부터 '해마다 모든 수익금을 기부하고 재투자를 받는다'는 원칙을 세운 뒤 이를 그대로 지켜 지금까지 수익금 전액을 자선단체에 기부하고 있다.

폴 뉴먼은 한걸음 더 나아가 1988년에는 어린이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산골짜기 갱단 캠프'를 설립했다.

'산골짜기 갱단 캠프'는 죽을 것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병마와 싸우는 어린이 환자들에게 유년 시절의 즐거움을 회복해주자는 취지의 자선 단체다.

코네티켓 주에서 시작돼 현재 미국 30여개 주, 프랑스 헝가리 우간다 베트남 등 세계 30여개국으로 확산된 이 캠프에서 지금까지 13만 여명의 어린이 환자들이 최상의 보호를 받아가며 낚시를 하고 말을 타며 수영을 즐겼다.

'산골짜기 갱단'의 카운슬러로 일했고 웹진 '슬레이트' 편집자 중의 한 명인 다일라 리트윅은 "폴 뉴먼이 캠프에 불쑥 나타나 아이들을 데리고 낚시를 가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이들이 알아보지 못할 때마다 즐거워하곤 했다"고 회고했다.

또 "다른 명사들이 자신의 기사가 실린 신문을 스크랩할 때 폴 뉴먼은 세계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모았다"면서 "(자선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각자의 인생에서 스스로가 진짜 스타라고 느끼게 만들어준 스타였다"고 말했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