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웠던 아버지-어깃장 난 아들 마음 이어준 6년 작업
《서로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영 어색하고 서툴렀다. 막내의 성적표를 볼 때마다 속상했던 아버지(조동환·73)와 공부 못한다고 야단치는 아버지가 무서웠던 아들(조해준·36). 6년 전 단절된 대화에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미술을 전공한 아들의 호기심이 실마리였다. 미술교사였던 아버지가 물려준 1927년 도록이 어떤 경로로 얻은 것인지, 아버지가 재직한 중학교에 있던 조각상은 어떻게 만든 것인지 궁금했다. 》
‘부자유친 드로잉’
서울 사는 아들은, 고향(전주)에 계신 아버지에게 질문했다. 아버지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들을 때마다 놀라웠다. 아들은 이런 개인사와 가족사를 글과 그림이 있는 다큐멘터리 드로잉으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다. 가슴 속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에서 편지와 전화, 얼굴을 맞댄 대화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나선 여정. 이는 곧 개인의 내밀한 삶인 동시에 현대사의 격랑을 헤쳐 나온 부모 세대의 초상을 포개놓은 기록이다. 절망이 일상화된 시대, 궁핍과 좌절의 현대사를 몸으로 부닥쳐온 세대의 곡진한 사연들. 이를 연필 드로잉으로 세밀하게 복원한 것이 ‘생생 父子 프로젝트’다. 2002년 ‘신세대 흐름’전에서 17장을 처음 선보인 이래 최근 ‘놀라운 아버지’(새만화책)의 출간과 대안공간 풀에서 전시도 열었다. 2008광주비엔날레에서도 이들의 공동작업을 볼 수 있다. 미술을 통해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소망을 이룬 두 사람을 만났다.
#놀라운 아버지… 삶의 질곡 큰 울림으로
내겐 전시나 책보다 6년의 시간이 소중하다. 공동작업이라 하지만 주인공은 아버지다. 무엇보다 이 프로젝트에선 과정의 의미가 중요하다. 아버지의 개인사가 근현대사와 맞물리는 지점도 있지만 얼어붙은 부자 관계가 미술이란 작업 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차츰 풀려나갔다.
아버지는 가슴에 남은 상처와 잘못한 일들에 대해 솔직하게 들려주셨다. 몰랐던 이야기를 들으며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는 것이 내 인생과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다.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 겪었던 삶의 질곡이란 점에서 울림이 컸다. 윗세대에 경외심이 생겼다. 내가 아버지 인생을 몰랐듯, 아버지는 초중고교 시절 내가 무슨 생각과 행동을 하며 보냈는지 궁금하다 하셨다. 그래서 내 이야기를 드로잉으로 펼치는 코멘터리 드로잉 ‘어깃장 난 아들’을 시작했다. 아버지와 나의 소통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 영상 취재 : 이훈구 기자
#대견한 아들… 나를 늦깎이 작가로
우리 또래가 다 그렇듯 내 일생은 파란만장했다. 어린 시절 온 가족이 장티푸스로 누워 있는데 나만 멀쩡했다. 그때 보리이삭으로 죽을 끓여 먹으며 살아났다. 이미 죽었을 사람인데 이런 일을 보려고 살아난 것 같다.
아들이 서른 살이 되도록 부자 간의 대화는 어림도 없는 얘기였다. 공동작업을 시작하면서 아들이 계획을 세우고 틈틈이 기억을 되살려 내가 드로잉을 했다. 지금까지 쌓인 것이 570여 장. 가난으로 찌든 삶, 자라면서 보고 들었던 소소한 얘기들, 징용 간 아버지를 따라 일본 홋카이도로 이주해 살던 시절, 귀국 후 어머니가 어렵게 모은 돈을 소매치기 당해 빈털터리가 된 일, 새마을운동 당시 ‘생각하며 일합시다’라는 조각상을 만든 일 등. 잊혀질 뻔 했던 기억이 세상에 나왔다. 어찌 그리 시시콜콜한 것까지 기억하느냐고 하는데 쓰라린 경험은 절대 잊을 수 없다. 여자들이 매운 시집살이를 기억하듯….
돌아보면 나는 내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다. 우리는 그런 세대다. 징용 간 아버지가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 벽에 머리를 찧으며 눈물을 흘리셨던 기억이 난다. 일본인 감독에게 구타당한 아버지는 누워만 계시다 사진 한 장 안 남긴 채 돌아가셨다. 내가 열한 살 무렵이고 아버님은 지금 해준이 나이셨다.
미술을 전공한 자로서 화집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뻔했으나 내가 드로잉한 것이 중국과 독일에 초청받고 하니까 조금 자신감도 생긴 것 같다. 아들이 대견하다. 이대로 열심히 해서 훌륭한 작가가 됐으면 하는 게 꿈이다. 그게 내 살아있을 때의 희망이다.
“해준아, 네가 있어 아버지는 노년에나마 빛을 보게 되어 기쁘다. 고맙다! 아들아, 사랑한다.”
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