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알아야 ‘더 큰 배우’ 된다
《영화배우들은 스스로를 “살얼음 위를 걷는 인생”이라고 말한다. 한두 편의 작품만 잘못 선택해도 대중과 언론의 뜨겁던 관심이 싹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우들은 자신의 능력과 외모를 차갑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 위치와 경쟁력을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아야 하며, 또 미래를 주도면밀하게 설계할 줄 알아야 한다. 기자가 아닌 팬으로서, 최근 안타까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고 여겨지는 배우들을 거론해 본다. 나는 그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위대한 배우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정재영=그는 분명 더 유명해지고 있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으며 더 주류로 편입되고 있다. 난 그런 그가 싫다. ‘실미도’(2003년)와 ‘아는 여자’(2004년)와 ‘귀여워’(2004년)와 ‘웰컴 투 동막골’(2005년)을 보면서 나는 그가 송강호를 능가하는 한국 최고의 연기자가 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외롭고 소수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진정성 넘치는 삶만이 풍겨낼 수 있는 ‘징한’ 유머를 구사했고 때론 치명적 살기를 뿜어냈다.
하지만 올해 들어 그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강철중: 공공의 적 1-1’과 ‘신기전’)는 흥행 성공에도 불구하고 매우 실망스러웠다. 꼭 ‘정재영’이 아닌, 다른 배우라도 할 수 있는 역할을 그는 하고 있었다. 난 그가 배우로서 ‘변신’을 한 게 아니라, 그를 진정으로 아끼는 팬들을 ‘배신’하고 있다고 본다. 난 그가 자꾸만 보편적인 배우로 변해가는 게 싫다. 특히 ‘신기전’에서 배용준 같은 머리와 짙은 아이라인을 하고 나와 스스로를 끝내주게 멋지고 매력적인 양 연기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정재영, 포에버!
▽김수로=영화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에서 자장면 배달부로 얼굴을 본격 알리기 시작한 김수로. 당시엔 그가 한 영화의 주연을 맡으리란 예상을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승승장구했고, 최근엔 ‘흡혈형사 나도열’(2006년)에 이어 ‘울학교 ET’(2008년)에서 보듯 주연으로 손색없는 연기를 보여줬다.
하지만 그는 성장과정에서 ‘성공의 역습’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가 성공했던 바로 그 이유가 이젠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김수로는 딜레마에 빠졌다. 진지한 연기로 폭을 넓히고 싶은데, 사람들은 ‘웃기지 않는’ 김수로를 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계속 웃기자니 “만날 똑같은 연기다”며 비난이다.
김수로는 TV 예능 프로그램(SBS ‘패밀리가 떴다’) 출연으로 ‘김계모’란 애칭을 얻으면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다. 여기서 그가 염두에 둬야 할 점은, TV는 어디까지나 ‘공짜’란 사실이다. TV에서 얻은 인기가 티켓파워로 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권상우와 송승헌과 탁재훈이 증명했다. 시청자들은 좋게 말하면 냉정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싸가지’가 없다. 차승원은 ‘국경의 남쪽’(2006년) 개봉을 앞두고 MBC ‘무한도전’에 부지런히 연속 출연했지만 결과는 ‘관객 30만’이란 재앙이었다.
영화배우는 영화로 승부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것이다. 사람들은 김수로의 모습에 즐거워하지만 정작 그의 영화엔 새로운 기대를 걸지 않는다. 나는 그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해줬으면 좋겠다. 그가 사람들의 기대를 의도적으로 저버리는 진짜 용기를 낼수록 그에겐 새로운 미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김수로, 포에버!
▽이성재=‘미술관 옆 동물원’(1998년)과 ‘주유소 습격사건’(1999년)과 ‘신라의 달밤’(2001년)과 ‘공공의 적’(2002년)의 이성재를 기억하시는지. 그는 변화무쌍하면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풍기는 배우였다. 그가 어떤 역할을 할지라도 그의 연기는 하나의 고유한 브랜드였다. 하지만 그는 ‘바람의 전설’(2004년)부터 변하기 시작하더니, ‘신석기 블루스’(2004년)와 ‘데이지’(2006년)에서는 실망스러웠고, ‘상사부일체’(2007년)에선 떨어진 인기와 존재감을 회복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란 예감이 들게 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성재가 ‘원 톱’ 주연으론 다소 약하지 않은가”라는 비판도 한다. 하지만 난 그의 연기력과 잠재력이 대한민국 최고 수준이라고 본다. 팬의 관점에서 볼 때 그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그가 마치 미혼의 꽃미남 청춘스타 영역까지 자신이 해낼 수 있다고 판단하는 데서 비롯되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는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미남은 아니다. 그는 외모가 아닌, 연기로 승부하는 배우다. 그런데 요즘 정체성이 불분명하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배역 말고, 그 자신이 진정 좋아하는 배역을 맡았으면 좋겠다. 이성재, 포에버!
※또 다른 배우들에 대한 언급은 다음 칼럼에서 계속됩니다.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