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암 짜맞춰 만든 ‘완벽한 밀실’
도굴 원천봉쇄… 발굴조사도 안해
조선 왕릉의 봉분 밑 지하에는 ‘비밀의 방’이 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이 잠든 석실(石室)이다. 석실은 지금까지 한 번도 그 실체가 드러난 적 없다. 한 번도 발굴 조사가 이뤄진 적이 없기 때문이다.
석실은 과연 어떻게 생겼을까. 현재로선 국가 의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와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석실의 비밀에 다가가는 수밖에 없다.
세종대왕과 왕비 소헌왕후가 함께 묻힌 조선 최초의 합장릉인 영릉(경기 여주군). 지하 3m에 석실이 있다. 조선시대 국법에 따르면 시신은 지하 1.5m 깊이에 묻어야 했다. 하지만 왕과 왕비는 지하 3m 깊이로 묻었는데 당시 극비사항이었다. 도굴을 막기 위해서였다. 영릉의 석실은 길이 3.80m, 너비 6m, 높이 1.70m에 이르렀다. 화강암으로 벽과 문, 천장을 만들어 이었는데, 석실 좌우 벽으로 쓰인 화강암 하나의 길이가 3.80m, 높이는 1.70m, 두께는 0.76m에 달할 정도로 거대했다.
이 거대하고 무거운 돌 부재(구조물의 뼈대를 이루는 재료)들을 잇는 데는 못을 사용하지 않고 부재를 서로 견고하게 짜 맞추는 목조 건축 방식이 도입됐다. 돌 부재 사이의 이음매는 인정(引釘)이라 불리는 대형 철제 연결고리로 고정시켰다. 조선 왕릉 석실의 구조를 연구한 김상협(명지대) 박사에 따르면 “이런 석조 건축 방식은 유례없는 첨단 기술”이다.
화강암 부재의 이음매 사이 틈은 석회와 모래, 흙을 섞은 삼물(三物)로 채우고 느릅나무 껍질을 삶은 물에 이겨 만든 방수재를 발랐다. 느릅나무 껍질의 코르크층은 물을 거의 통과시키지 않는 성질이 있는데 선조들이 이를 알았던 것이다.
석실 입구는 미닫이 형식의 돌문으로 막았다.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시신을 안치한 뒤 마지막으로 이 돌문 앞에 문의석(門倚石)이라 불리는 넓이 2m, 높이 1.5m의 돌을 설치해 ‘이중 돌 빗장’을 채웠다. 도굴범이 이렇게 탄탄한 석실의 방어 구조를 뚫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석실은커녕 석실 입구까지 오기도 힘들다. 석실 사방은 삼물 반죽을 1.20m 두께로 채우고 다진 잡석을 또 그만큼의 두께로 채웠다. 삼물은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굳는다. 석실 외부도 이중 방어막이 구축돼 있는 셈. 조선 왕릉의 석실은 한 번도 도굴된 적이 없다.
석실 바닥 관이 놓이는 부분에는 돌을 깔지 않았다. 돌은 시신을 차갑게 할 뿐 아니라 땅의 기운을 막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바닥에는 구리로 만든 촘촘한 그물망인 동망(銅網)을 깔았다. 물길을 만들어 빗물을 내보내고 뱀은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왕과 왕비의 시신 사이에는 두께 1.20m의 돌벽을 설치하고 벽의 중간에는 0.50m² 크기의 창혈(窓穴)이라는 구멍을 뚫었다. 그 틈 사이에 부장품을 놓았다는 기록이 있으나 영혼이 서로 오갈 수 있도록 뚫은 통로라는 낭만적인 해석도 있다. 부장품은 나무로 만들어 금칠한 옥쇄와 왕이 평상시 좋아했던 글이나 그림을 넣었다.
조선 왕릉의 석실에도 고구려 고분이나 고려 왕릉처럼 벽화가 있었다. 석회를 바른 뒤 기름먹으로 천장에는 해, 달, 별, 은하를 그려 천상을 나타내고 사방에는 청룡(동쪽) 백호(서쪽) 주작(남쪽), 현무(북쪽)를 그렸다. 고구려 고분벽화가 조선시대에 어떻게 계승됐는지 보여 주는 단서가 조선 왕릉의 석실에 숨어 있는 것이다.
윤완준 기자 zeit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