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오페라 거장 프라이어
‘예브게니…’공연 파격 연출
“논란없는 작품 롱런 힘들어”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오페라 극장에서의 초연날 풍경은 살벌하다. 연출가, 지휘자, 배우들도 관객들의 신랄한 반응을 피할 수 없다. 지난해 뮌헨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된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했던 거장 미술가이자 오페라 연출가인 아힘 프라이어(74)를 30일 오전 독일 베를린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 만났다.
“초연 무대에서 ‘스캔들’이 없는 작품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스캔들이란 그만큼 관객들이 상상해오던 것을 깨뜨리고 전복했다는 것이거든요.”
동독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극작가 브레히트의 제자로 연출과 무대미술을 배웠던 그는 50여 년간 평생 150여 편의 오페라를 연출해왔다. 독일 표현주의 미술가의 대표자였던 그의 무대는 늘 파격적인 이미지가 넘쳐났다.
이틀 전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와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주역을 맡은 차이콥스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연날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막 중간 부분에 축제 분위기에서 갑자기 객석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아힘 프라이어, 당신은 틀렸소! 열정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에서 왜 이렇게 지루하오?”
이날 무대는 렌스키 역을 맡은 비야손은 마치 광대를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었고, 앞으로 비스듬히 세워진 무대가 옆으로 갈라지는 등 볼거리가 많았다. 공연을 마친 후 커튼콜 때 롤란도 비야손을 비롯한 가수들에게는 우레와 같은 박수와 브라보가 쏟아졌지만,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에게는 ‘브라보’와 함께 ‘우~우~’ 야유가 섞여 떠들썩한 분위기였다.
공연이 끝난 후 수백여 명의 출연진은 도이치 오퍼의 옆 건물의 카페테리어에서 프리미어 파티를 열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롤란도 비야손, 아힘 프라이어 등 출연진이 모두 참석해 맥주를 마시는 파티였다. 흥미로운 것은 파티에서 아힘이 소개되자 롤란도 비야손이 ‘브라보!’ ‘브라보!’를 열정적으로 외쳤는 데도, 뒤에서 일부 합창단원들은 야유를 보냈던 것. 아무리 공연에 신랄한 평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같은 출연진끼리도 야유를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힘 프라이어는 오히려 밝은 표정이었다. 파티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는 “삶이란 그토록 지루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축제를 그렇게 표현했다”며 “삶이란 누구나 지루한 일상인데 관객들이 그걸 무대에서 직시하게 되니 화가 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첫 공연 때 브라보와 야유가 공존하는 작품은 그만큼 이야기거리가 많다는 뜻으로, 수십년 동안 장기 공연되게 마련”이라며 “만하임 극장에서 초연된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처럼 30~40년이 넘도록 계속 공연되고 있는 내 작품들은 모두 초연 날에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늘 스캔들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키치로 가득한 팝아트가 곧 바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몄기 때문”이라며 “거짓은 오래 갈 수 없으며, 고통스럽더라도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롱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00년 전에 창작된 ‘예브게니 오네긴’을 관례대로 똑같이 연출한다면 사람들은 ‘나는 오네긴을 알아’하면서 더 이상 극장에 오지 않을 것”이라며 “예술은 반복하는 순간 죽음”이라고 말했다.
아힘 프라이어는 자택의 복도와 방 곳곳에 수천점의 자신의 미술작품과 평생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과 미술작품을 조만간 베를린 시에 박물관으로 기증할 예정이다.
“지난해 뮌헨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진은숙의 음악이 너무 아름다우 연출을 맡게 됐어요. 세계초연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야유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죠. 어떤 연출가는 나쁜 비평을 듣지 않기 위해 세계초연작품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존 유명작품을 확 뒤집어서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 더 재밌습니다.”
아힘 프라이어는 2년 후인 2009년부터 플라시도 도밍고가 극장장으로 있는 미국 LA오페라 하우스에서 2년 간 ‘링 사이클’의 연출을 맡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그는 “그동안 공연된 ‘링’은 연출가들이 ‘링’을 통해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 이야기했다”며 “내년에 LA에서 내가 연출하는 ‘링 사이클’은 과연 ‘링’이 어떤 작품인가라는 본질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베를린=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