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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P세대]국제적 잠재역량

입력 | 2008-10-02 03:26:00


외국어-인터넷 무장 2030… 이력서 첫칸에 ‘세계’를 쓴다

《올해 여름 대학을 졸업한 선현우(27) 씨는 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없다. 하지만 3개 외국어를 구사한다. 영어는 경시대회에서 입상할 정도이고 일본어와 중국어도 불편 없이 대화를 나눌 수준이다. 인터넷으로 외국 친구를 사귀고 외국어 책을 탐독하며 익힌 실력이다.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웹 사이트에서 1인 방송국 운영자로 일하는 그는 최근 미국의 한 손수제작물(UCC) 인터넷 사이트에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4개 언어를 동시에 가르치는 강좌 동영상을 올려 ‘글로벌 유명인사’가 됐다. “동영상을 본 많은 외국인이 인터넷을 통해 ‘당신한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제안을 해왔어요. 언어를 매개로 짧은 시간에 전 세계에 인맥이 만들어지더군요.”》

한국의 2030 IP(Independent Producer·독립적 생산자)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해 ‘글로벌’에 익숙하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상상 속에서가 아니라 삶 속에서 체감하며 자란 세대다.

○ 태생적 글로벌리스트(Globalist)

이탈리아 로마의 세계식량계획(WFP)에서 최근 3년간 일한 박세은(30·여) 씨는 요즘 그 경험을 토대로 유엔 같은 더 큰 국제기구 진출을 준비 중이다. 박 씨는 “어린 시절 은행원인 아버지를 따라 싱가포르에서 4년 거주했던 경험이 내 인생의 방향을 국제기구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에 따르면 초중고교 시절 해외 유학을 위해 출국한 학생의 수는 1996년 3573명에서 2006년 2만9511명으로 8.2배로 증가했다.

세계와 실시간으로 연동되는 인터넷은 IP세대의 글로벌 능력을 키워준 ‘베이비시터(보모)’와 같다.

평범한 한국인 학생으로 동생들과 함께 뉴질랜드에서 유학 중인 임정현(24) 씨는 인터넷에 올린 기타 연주 동영상 한 편으로 ‘글로벌 스타’가 됐다. 인터넷을 통해 그의 연주를 본 사람은 한국의 인구(4800만 명)만큼이나 된다.

2002년 서울의 야후코리아에 입사한 서준원(32) 대리는 지난해 미국 본사의 시니어 엔지니어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미국에서도 한국은 일반 유저(user)를 포함해 정보기술(IT)이 앞서 있는 나라라는 인식이 많다”고 말했다.

대학 4학년생인 우성미(22) 씨는 대학 입학 이후 자신의 ‘글로벌 프로필’을 관리해 왔다. 일찌감치 해외 진출을 결심한 우 씨는 국제노동기구(ILO), 노무라증권 등에서 차례로 인턴 근무를 하는 등 체계적인 준비를 하고 있다.

○ 세계와 언제든 맞짱 뜰 수 있는 배짱

“못하는 영어로 자신의 표현을 다하더라. 한국어로 소감 발표를 하라고 했지만 영어로 하겠다고 했단다.”

한 골프 동호회의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올해 8월 신장 156cm의 토종 프로 골퍼 신지애(20) 씨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의 메이저 대회인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한 뒤 어눌하지만 당당한 영어로 소감을 밝힌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LG그룹의 한 고위 임원도 “‘영어 콤플렉스’ 속에서 살아온 40, 50대 중장년층은 상상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며 “세계 속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그 배짱이 부러웠다”고 말했다.

함성철 제일기획 브랜드마케팅연구소 국장은 “지금의 2030세대는 박찬호(35) 선수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빅리거’들을 삼진 아웃시키고 박세리(31) 선수가 LPGA 우승을 밥 먹듯 하는 장면을 친숙하게 보고 자란 세대”라고 분석했다. 글로벌 경쟁이나 미지의 도전에 결코 주눅 들지 않는 토대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종합상사 최초의 여성 석유개발 연구원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유전 발굴을 하고 있는 LG상사 오승은(27) 씨도 글로벌 경쟁을 즐기는 대표적 IP세대다. 오 씨는 동아일보와의 국제통화에서 “낯선 외국 땅에서 다른 문화를 접하며 개인적인 역량을 키우는 일에서 큰 성취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우리 것, 남의 것을 가리지 않고 문화를 혼합해 ‘세계화된 우리 것’을 만드는 이른바 ‘세계지역화(Glocalization)’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도 IP세대다.

○ 현실에서 적지 않은 좌절도 느껴

서울의 한 대학에서 어문계열을 전공한 최모(27·여) 씨는 미국과 중국 연수 등으로 두 외국어에 모두 능통하지만 요즘도 인턴사원을 전전하고 있다. 최 씨는 “KOTRA나 종합상사 같은 곳에 입사해 내 글로벌 능력을 맘껏 발휘하고 싶지만 경쟁이 너무 심하다”고 털어놓았다.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34) 씨는 “공대를 나와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하루도 쉬지 않고 해왔지만 능력을 발휘할 일이 좀처럼 없다”며 “연봉 많은 외국계 보험회사로 전직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잠재역량을 활용하기가 그리 쉽지 않은 현실은 글로벌화된 IP세대의 한 고민이다. 물론 기업 등 채용 주체들이 이들을 환영할 수만은 없는 이유도 있겠지만 뛰어난 외국어 실력, 다양한 해외 경험, 외국 문화에 대한 열린 자세 등 IP세대의 글로벌 능력이 입사시험을 위한 ‘지원서용’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글로벌화된 젊은 인재들의 경쟁력을 활용할 기반을 만드는 것이 우리 사회의 숙제”라고 말했다.

김용석 기자 nex@donga.com

정효진 기자 wiseweb@donga.com

김지현 기자 jhk8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