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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 속의 오늘]1970년 北조류학자 원홍구 박사 사망

입력 | 2008-10-03 02:58:00


아버지는 북한의 조류학자였다. 평북 삭주에서 태어나 일본의 가고시마(鹿兒島)고등농림학교로 유학 갔다.

경기 송도고등보통학교와 평남 안주공립농업학교 교사, 함남 영생여고 교장과 평남 덕천공립농업학교 교장을 거쳐 1947년 김일성종합대 생물학부 부교수로 취임했다.

아들은 남한의 조류학자였다. 경기도 개성에서 4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따라 산과 들로 새를 쫓아다녔다.

김일성종합대 농학부 축산과에 1947년 입학했다가 단과대로 분리된 원산농업대를 졸업했다. 일본 홋카이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경희대 교수가 됐다.

부자(父子)는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헤어졌다. 아버지는 아내 및 두 딸과 함께 북한에 남고 세 아들(둘째는 일제 강점기 만주서 사망)만 남으로 피신시켰다.

사는 곳은 달랐지만 부자가 하는 일은 같았다. 휴전선에 가로막힌 두 사람을 휴전선을 자유롭게 오고가는 새가 이어줬다.

원병오 경희대 명예교수는 1965년 일본 도쿄의 국제조류보호회의(현재 국제조류보호연맹) 아시아지역본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여름 철새인 북방쇠찌르레기에 ‘農林省 JAPAN C7655’라는 일제 알루미늄표지 가락지를 달아서 보낸 적이 있느냐는 내용이었다.

북한과학원 생물학연구소장인 원홍구 박사는 평양 만수대 기슭 숲에서 이 새를 잡았다. 일본에서 살거나 지나가지 않는 새에서 일제 가락지를 보고 의아하게 생각해서 일본학자들에게 물었던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가락지를 원병오 교수에게 준 적이 있음을 떠올리고 당사자에게 확인한 뒤 북한에 알려줬다.

원 교수가 가락지를 달았던 새는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2년 뒤 봄에 남쪽으로 내려갔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평양으로 날아갔다.

남북의 부자 조류학자가 15년 만에 새를 통해 생사를 확인했다는 내용은 소련의 프라우다, 북한의 노동신문을 거쳐 미국과 일본의 신문에 크게 보도됐다.

아버지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막내아들 이름을 부르며 1970년 10월 3일 눈을 감았다. 아들은 일본학자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 북쪽을 향해 절하며 울었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