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년 전의 외환위기는 국제적 요인도 있었지만 김영삼 정부의 경제 리더십 실종과 크고 작은 정책 실패가 맞물린 결과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라는 부자나라클럽에 빨리 가입하려는 정치적 조급증 탓에 금융시장, 특히 단기성 국제금융거래를 너무 서둘러 자유화했다. 그 시절의 재정경제원은 국제금융 감독을 감당할 능력도 없으면서 종금사 설립 허가를 남발(24개)해 단기외채 급증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
1997년 그해,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사태 대응에서 때를 놓친 것도 외환위기를 재촉했다. 기아차 사태 때 정부는 3개월을 허송한 뒤에야 법정관리를 결정했다. 법정관리든, 부도처리든 기민하게 했더라면 국제 신인도(信認度)가 치명적 상태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파이낸셜타임스는 ‘한국에서 달러보다 부족한 것은 리더십’이라 했고, 페레그린증권은 허둥대는 정부를 보며 ‘즉시 한국을 떠나라’는 투자 보고서를 냈다.
지금 세계 금융위기의 기폭제가 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은 이미 작년 4, 5월에 경고음을 울렸다. 물론 그 시점엔 미국 거대 투자은행(IB)들의 파산, 세계적 신용경색, 달러 유동성 고갈까지 점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미국 금융기관들의 경영 악화와 이에 따른 외환시장 경색 가능성은 예고됐다.
사소한 듯한 정책실패도 致命打
그런데도 노무현 정부는 작년 여름에 달러 유입을 억제하는 두 가지 정책을 선택했다. 하나는 기업 운용자금 용도에 대한 외화 대출 규제이고, 또 하나는 국내에서 영업하는 외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달러 차입 제한이었다. 이는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과 달러 부족에 대비하기는커녕 달러 유입 및 유통 통로를 좁혀버린 조치다.
명분이 없지는 않았다. 달러가 많이 들어오면 원화 가치가 절상(환율이 절하)돼 수출 등 경제운용에 부담이 되고, 명목상이지만 외채 증가 요인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내외 시장 상황의 급변 조짐에 둔감한 ‘엇박자 정책’이었다.
외국계 금융기관에 대한 차입 규제(과소자본세제 손금비율 절반 축소)를 실제로 시작한 것은 올해 1월 1일이다. 작년 말엔 달러 유동성 부족이 심각해진 상황이었음에도 정부는 이 조치를 강행했다.
이 정책은 시행 만 9개월 만인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백지화됐다. 이 결정도 달러 유동성 확보를 위한 선제적 대응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서 취한 궁여지책이었다.
현 정부는 큰 틀의 환율정책에서 국내외 변수를 예견하지 못하거나 타이밍을 놓쳤다. 처음엔 국제유가 및 원자재 값 폭등 목전에 원화 약세화(환율 상승)를 유도하는 정책에 매달렸다. 하지만 물가 불안이 수출 증대 효과를 덮어버렸고 국제수지 적자도 개선되지 않았다. 결국 7월 이후 환율 하락(원화 강세화) 쪽으로 정책 기조를 바꿨으나 요즘은 이도저도 아닌 혼돈 상태다.
성과도 없는 환율 방어를 위해 귀중한 보유외환 200억 달러 이상을 소진한 것이 지금까지의 결과다. 7월 7일 정부가 ‘환율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대규모 시장 개입에 나서자 7월 9일 환율은 1달러에 990원대까지 떨어졌지만 어제는 정부가 개입했음에도 2002년 5월 이후 최고치인 1269원을 기록했다. 세계적 신용마비, 금융위기의 유럽연합(EU) 확산, 국내 시중의 달러 고갈로 직격탄을 맞은 것이지만 외환 관리의 정책 실패가 상황을 악화시켰다.
외환은행 매각의 타이밍을 놓친 것도 일종의 정책 실패다. 금융당국이 좌고우면하며 시간을 끄는 와중에 미국발 금융위기가 본격화하자 HSBC가 인수계획을 취소해버렸다. 갑자기 다른 먹잇감(M&A 대상)이 많이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정부는 글로벌 우량은행의 국내 진출로 은행산업의 선진화 기반을 다지고 달러 기근도 완화할 기회를 놓쳤다.
위기탈출에 국가지혜 집중해야
정부 정책도 기업 경영처럼 결과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다. 강론을 아무리 잘해도 정책 실전(實戰)에서 성공하지 못하면 소용없다. 전문가의 실책(失策)은 문외한의 무지(無知·無智) 이상으로 치명적이다.
세계적으로 자고 나면 금융회사 하나가 망하는 전례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국내 금융시장도 불안이 팽배하다. 어제는 거의 패닉(공황) 조짐을 보였다. 부동산시장은 또 하나의 거대 뇌관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정책 당국자들이 고도의 집중력과 민관(民官)의 지혜를 총결집해 우리 경제의 지뢰밭 탈출을 실수 없이 이끌어야 한다. 정책조합을 잘못 선택하면 만회가 어려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금융난세다.
배인준 논설주간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