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에는 이상을 품자.”
혁명가, 정치가, 의사, 게릴라 지도자인 체 게바라(1928∼1967)는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태어났다.
의사시험에 합격한 그는 편안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일생을 바꾸는 경험을 한 이후 혁명가의 길에 뛰어들게 된다.
대학시절 그는 친구와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를 여행했다.(이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라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여행 도중 미국과 유럽의 농장주들에게 박해받는 남미의 가난한 농민과 빈민을 목격한 뒤 빈부격차, 계급문제 등에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혁명가가 된다.
체 게바라는 28세 때 피델 카스트로를 만나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켜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던 독재정부를 무너뜨린다.
그는 혁명 후에 쿠바 재무국장이 되지만 한곳에 안주하는 생활에 싫증을 느꼈다. 37세 때 공산주의의 모토인 ‘세계혁명’을 실천하기 위해 아프리카 앙골라에 건너가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실패했다.
39세 때 볼리비아에서 다시 게릴라전에 참여하였다가 1967년 10월 8일 총상을 입고 포로로 잡혀 그 다음 날 바로 총살됐다.
체 게바라에 대한 평가는 양극단으로 갈린다. ‘세계혁명’을 이루기 위해 실천에 나선 영웅이라는 측면과 잔인하고 무능력한 데다 과대망상증과 소영웅주의에 빠진 몽상가라는 것이다.
체 게바라가 쿠바 재무국장이던 시절 쿠바의 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졌고 게릴라전을 펼쳤을 때도 그의 작전능력과 정보수집능력은 형편없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잔인했는데, 혁명에 대해 비판적이거나 회의적인 생각을 가진 부하들은 직접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죽이기도 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세기의 풍운아’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듯하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귀영화를 좇고 안락한 삶을 바란다. 젊었을 때 품었던 이상과 정열을 잃은 채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체 게바라는 의사로서의 편안한 삶을 마다하고 혁명의 길에 뛰어들어 39세에 요절할 때까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직접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