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
1911년 10월 9일 오후 중국 후베이(湖北) 성 한커우(漢口)의 러시아 조계에서 요란한 폭발음이 울렸다.
한커우는 양쯔(揚子) 강 유역에서 상하이(上海) 다음 가는 경제중심지이자 외국 영사관과 상사들이 모인 매우 소란한 도시. 하지만 워낙 소리가 컸던 탓에 공안당국도 무시할 수 없었다. 즉각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문서와 깃발, 화약, 군표(임시지폐) 등을 압수했다.
이곳은 청나라를 전복하고 공화정 수립을 노리는 혁명조직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共進會) 연합조직의 비밀 근거지였다. 혁명세력이 밀조하던 폭약이 폭발하는 사고가 나면서 당초 며칠 뒤로 잡아뒀던 거사계획이 들통 난 것이었다.
특히 압수된 문서 중에는 거사에 참여키로 한 당인(黨人) 명부가 포함돼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 지역 총독은 곧바로 계엄령과 함께 대대적인 체포령을 내렸다.
혁명의 중추세력은 신군(新軍·신식 육군) 내 조직원들이었다. 아편전쟁 패배 이후 조직되기 시작한 신군의 병사들은 엄격한 신체검사와 작문시험까지 거쳐 선발됐다. 무식하고 늙고, 떠돌이가 많았던 구식 군대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이 때문에 신군 병사들은 혁명세력의 집중 포섭 대상이었다. 이미 안칭(安慶) 광저우(廣州) 등에서 신군의 조직적 반란이 일어났다. 청조 당국자는 “호랑이를 길러 지키게 했다(양호자위·養虎自衛)”고 개탄할 정도였다.(민두기의 ‘신해혁명사’)
더는 거사를 늦출 수 없게 된 혁명 지도부는 거사를 앞당겨 당장 이날 밤 12시 포병대의 신호에 맞춰 일제히 봉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이 채 전파되기도 전에 강 건너 우창(武昌)의 군사지휘부가 당국의 급습을 받으면서 9일 밤 거사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다음 날 새벽까지 혁명 지도부는 거의 궤멸됐다. 하지만 남은 세력은 거사를 포기할 수 없었다. 신군 내 조직원들이 당장 신변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처하자 우창의 공병부대는 10일 오후 8시경 거사를 단행했다.
이들의 반란을 시작으로 혁명세력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총독 관서와 사단본부까지 점령하면서 우창을 완전 장악했다. 신해혁명의 발단이 된 ‘우창봉기’는 이렇게 시작됐고 불과 한 달 만에 전국의 거의 모든 성(省)이 독립을 선언했다.
예기치 않은 놀라운 성공이었다. 하지만 준비가 부족했던 혁명세력은 이듬해 1월 1일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도 위안스카이(袁世凱)에게 권력을 넘겨줘 새로운 황제의 등극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