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속있는 곳에 만남 있다”
‘유목형 관계’로 상부상조
《올해로 사회생활 6년차인 증권사 직원 C(30) 씨는 벌써 세 번이나 직장을 옮겼다. 자주 직장을 옮긴 건 더 많은 지식, 수입, 네트워크를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같은 업계의 다른 회사로 옮기다 보니 주변 어른들로부터 “예전 직장 사람들하고 마주칠 일이 많아서 좀 그렇지 않으냐”, “옮길 때마다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에 적응하는 게 힘들지 않으냐”는 걱정을 듣는다. 그러나 C 씨의 생각은 다르다. “20, 30년간 같은 회사에서 같은 사람들과 쭉 근무를 하신 어른들의 기준으로 보면 이해가 안 되실 겁니다. 그러나 저희 세대는 직장 생활을 할 때 인간관계보다는 목표나 성취감을 중시하고 그만큼 맺고 끊는 게 정확하죠. 기성세대보다 사람 관계에서 인간미가 떨어진다는 건 인정하지만 더 합리적인 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프로젝트형 대인관계… 친분보다 실력 중시
“합리성 강점 있지만 공동체 의식 결핍도”
○ 계약기간이 있는 실용적 합리적 인간관계
IP세대의 인간관계는 ‘즉흥적인 인간관계(Instant Partnership)’로 표현된다. 그들에게 ‘의리’ ‘정’ ‘평생 우정’ 같은 단어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데 최우선 가치가 아니다.
자신의 목표와 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가 인간관계 구축에서 중요한 고려 사항이다. 그런 만큼 IP세대의 인간관계는 즉흥적이며 기한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재학 중인 이모(29) 씨는 수많은 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즉흥적인 관계를 수없이 맺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한 학기 동안 같이할 프로젝트팀을 꾸릴 때 가장 중요시하는 건 친분이 아니라 실력입니다. 이번 학기 동안 좋은 성과를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죠. 인간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실력만 있다면 얼마든지 쉽게 팀을 이루죠.”
이 씨는 “보통 이렇게 구성된 팀의 구성원들은 학기말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그냥 아는 사람’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하지만 언제든 서로 도움이 필요할 땐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서로에게 배울 점은 적극적으로 배운다”고 말했다.
이 같은 모습은 IP세대의 성장환경을 감안할 때 당연하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박기수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IP세대들은 부동산 가격, 학군 등에 따라 초등학교 때부터 이사를 많이 했고 한국의 그 어느 세대보다 치열한 경쟁을 경험했다”라며 “이 과정에서 짧은 인간관계, 성과를 중시하는 인간관계에 익숙해진 세대”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또 “실속을 중시하며, 맺고 끊는 게 정확한 IP세대의 인간관계에는 합리성도 담겨 있다”며 “사람을 평가할 때 배경, 출신, 소속 같은 ‘간판’ 대신 실력을 강조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 인터넷의 유목민적 인간관계
IP세대의 인간관계는 인터넷 문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공동의 목적을 위해 재빨리 구성되고 목적을 이행하면 흔적 없이 떠나는 인터넷 공간의 ‘노마드(유목민)적 특성’이 작용하고 있는 것.
대학원생 박모(27) 씨는 인터넷 카페와 클럽 등 100여 개의 온라인 모임에 가입했다. 재테크, 와인, 헬스, 건강, 패션 등 웹서핑을 통해 정보를 교류하고 좀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오프라인 모임에도 한두 차례 나가봤다.
박 씨는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끼리 짧은 만남이긴 하지만 새로운 사람을 다양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며 “온라인 모임은 인간관계의 폭을 확장시켰다”고 말했다.
파티플래너 정건영(31) 씨는 싸이월드 일촌 수가 1만5000여 명으로 2006년에 일촌이 가장 많은 회원으로 뽑혔다.
“예전에는 필요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소개를 받고 문의를 하는 등 여러 단계를 거쳤지만 인터넷에서는 한 번에 연결돼 좋습니다. 취미인 여행, 오토바이, 운전 등에 관심 있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들과 자주 만나거나 깊은 교제를 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모르는 것들을 수시로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선 무척 좋습니다.”
○ 공동체 의식 결핍, 가족 해체 등 우려
IP세대의 인간관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목표를 위해 빠르게 관계를 형성하거나 정리하는 건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박기수 교수는 “IP세대의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계속 심해진다면 합리성을 넘어 단절을 불러올 수 있다”며 “이로 인한 공동체 의식 결핍, 가족 해체 등이 더욱 많아질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휴대전화나 인터넷 등 통신수단을 통해서도 만나고 헤어지는 게 자연스럽고, 오프라인 관계에서도 끈적끈적한 게 별로 없는 IP세대의 인간관계는 기성세대의 기준으로 볼 땐 이해하기 힘들어 세대 간 갈등을 불러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